글쓰기 할 때 처음에는 질보다 양에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원고지 9장 정도 즉 A4용지 한 장을 쓰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A4용지 한 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오래 전부터 베껴쓰기를 하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2,3년째 시험을 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몸에 와닿는 향상의 느낌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그 조언을 믿고 ‘무데뽀(無鉄砲)’ 따라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배운 베껴쓰기의 이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주어 동사가 서로 발목 잡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특히 복문일 때 주어와 동사가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문장력이 늘은 것 같습니다. 무언가 말의 첫마디를 잡으면 어쨌든 문장이 이루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베껴쓰기의 원칙은 이순원 소설가로부터 배운 것인데 문장 전체를 외우고 나서 보지 않고 노트에 옮겨 적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루한 작업인데 제 경험으로는 적어도 2년은 해야 겨우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지 않나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은유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은유는 통상적으로 설명하면 ‘유사성’을 축으로 한 묘사를 말합니다. 가장 흔하게 드는 예가 김동명의 ‘내 마음은 호수요’입니다. 그러나 엄경희의 『은유』에 보면 은유에는 유사성을 축으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차이성’을 축으로 한 은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과 호수가 가진 속성의 등위가 다른 것인데도 같이 붙여버리는 것입니다. 앞의 김동명의 예를 원용한다면 ‘내 마음이 호수를 발로 차버렸다’는 식으로 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차이성을 축으로 한 은유의 발견은 획기적 일이었습니다.
글쓰기는 도대체 왜 할까요? 어떤 사람은 글쓰기를 하라면 진저리치면서 고개를 도리질합니다. 자기는 도저히 어려워서, 혹은 체질에 맞지 않아서 못 쓰겠다고 합니다. 또는 별로 취미에 맞지 않다고 회피합니다. 저는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주위에 글쓰기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또 그토록 오래 글을 쓴다고 하면서도 남들이 인정해주는 것도 아닌데, 쓴다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너는 뭣 때문에 쓰느냐고 묻게 됩니다.
첫째는 저의 생각을, 마음을 정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여학생에게 차이고 나서 상심한 끝에 자연스럽게 글(詩)을 쓰면 마음이 안정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FM라디오에서 24시간 클래식을 들려주는 채널이 있었습니다. 하숙방에서 텔레비전도 없으니 들을 것이라고는 클래식뿐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재능이 없어서 객관적 평가를 얻지 못한 처지가 되었습니다만 이제는 저 자신의 능력의 몫을 수용하는 입장이니 그것마저 별로 갈등은 없습니다.
둘째는 어쩌면 현학적(衒學的)인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생각납니다. 취미판단에는 심미적 판단과 숭고판단이 있다고 합니다. 자연 앞에 나아가 그 크기, 힘에 압도되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렇게 중요하다고 느낀 재산, 건강, 생명에 대한 반성을 하여, 그들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의 여유, 평안함을 줄 수 있는 것이 숭고판단입니다. 반면에 심미적 판단은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이 우리의 이념(이성)과 만남으로써 인식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와 함께 마음의 생기(에스프리)가 일어나는 정신의 원리인 것입니다. 수필이나 시나 소설을 쓸 때 우리는 미술이나 음악에서의 아름다움처럼 그런 정신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약간 잘난 체 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겠습니다. 속칭 인간은 저 잘난 맛에 산다고들 합니다. 남보다 내가 낫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이 하는 짓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하다 못해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해도 좀 더 예뻐보이려고 파마도 하고 여길 좀 더 쳐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도 2004년엔 졸작 시들을 모아서 자비로 시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딱히 부정적 의미만 있는 것을 아닐 것입니다. 어쨌든 어제의 나보다는 나아보이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쯤으로 보아줄 만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에 대해 관심과 흥미가 있어 오랜 세월 동안 글쓰기 책을 읽어왔습니다. 언젠가 제가 읽은 그런 책을 세어보니 백여권이 넘었습니다. 워낙 둔재라서 그렇게 읽고도 글쓰기의 비법에 아직도 도가 통하지 못했으니 어쩌면 한심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 많은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오규원의 『현대시작법』과 나탈리 골드버그의 『글쓰며 사는 삶』과 수전 티베르기앵의 『글쓰는 삶의 일년』은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규원에게서 배운 것은 시적 대상에 대한 관점과 지각입니다. 시적 대상은 크게 나누어 관념적 대상과 실재적 대상으로 나누고 전자는 풍자적 지각과 해석적 지각이 있고 후자는 감각적 지각과 사실적 지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결국 감각적 지각, 즉 이미지를 주로 하는 시가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시적 언술의 형태입니다. 이것은 묘사와 진술인데 묘사에는 서경적 묘사, 심상적 묘사와 서사적 묘사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심상적 묘사 즉 mental picture는 현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라 비현실적인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이미지는 은유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저의 시의 감상은 기본적으로 그 작품이 진술이냐 묘사이냐를 구분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수전 티베르기앵으로부터는 산문시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그녀가 쓴 산문시가 저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배나무」
창밖으로 우리 집 앞마당 한가운데는 작은 배나무가 한 그루가 기우뚱하게 서 있다. 줄기는 어두운 회색이다. 앙상한 가지 위로 성기게 꽃을 피웠다. 나는 이 나무를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여러 해 전에 심은 이 나무는 목재 말뚝을 받쳐주었는데도 휘어져 자랐다. 나중에 결국 그 말뚝을 뽑아내면서도 거식증 환자처럼 앙상한 가지들이 버텨줄지 걱정이 되었다.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는 가슴 팍을 가로 지른 모진 스카프로 휠체어에 단단히 묶여 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이다. 눈은 어두운 회색 원안으로만 보인다. 나는 그 눈동자에서 빛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어둠만이 보일 뿐이다. 그녀의 손가락들이 스웨터의 마지막 단추를 잠그려 애쓴다.
오늘 반 고흐의 「꽃을 피운 배나무」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받았다. 그림 속 배나무의 어두운 회색 몸통은 비틀려 있고, 가지들도 흉한 몰골로 뻗어 있었다. 하지만 그 옹이 투성이 나무 속에는 온갖 색깔이 담겨 있었고, 짙은 색 이파리 몇 장에 둘러싸인 하얀 꽃의 만다라가 있었다.
창밖으로 본 앙상하고 말라비틀어진 배나무를 보면서 그녀는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반전으로 고흐의 「꽃을 피운 배나무」 그림 엽서를 통하여 시어머니가 초라한 것이 아니라 하얀 꽃의 만다라로 승화됩니다. 이런 식의 작법은 일본의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산문시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책은 거의 다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글쓰기를 하면서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녀는 시간을 정해놓고 쓰되 쓰기를 멈추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글쓰기를 하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당겨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잘 쓰려고 하니까 과연 이것이 자격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들어 자꾸 멈칫거립니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그때 멈추지 말고 할 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쓸 것이 없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식으로라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연설작가라고 하는 강원국이 강의하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글쓰기의 두려움을 이기는 법」라는 제목에 이끌렸습니다. 왜냐하면 글쓰기를 좋아하면서도, 또 글을 써야지 하면서도 정작 글을 쓰지 않는 저를 너무 자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러 가지 말을 하고 있는데 자기 나름의 글쓰기 하기 전의 Routine에 대해서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의 Routine은 산책하고 아메리카노 마시고 샤워하고 글쓰기에 돌입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Routine을 만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글쓰기의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야구 선수 중에 이런 Routine을 하는 선수가 있습니다. 좌타자인 스즈키 이치로(鈴木一朗) 선수는 타석에 들어가면 두 손으로 배터를 얼굴 앞에서 휘둘러 오른쪽으로 향하게 한 다음 왼손은 오른쪽 어깨 앞에 얹고 오른손 한손으로 배터를 잡고 한 템포를 잡은 다음, 배터를 아래 내려 양손으로 잡고 마지막 타격 폼을 잡습니다. 이러한 Routine을 통해서 이제는 오로지 타격에만 집중하는 준비를 마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타격을 하기 전의 스즈키 이치로만의 Routine인 셈입니다.
저도 이런 것들을 원용하여 저도 저만의 Routine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침에는 병원의 처리할 일도 있고 해서 지내다가 점심 식사 후 잠시 오수를 즐긴 다음 30분간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를 30분간 듣고 커피를 한잔 마시고 그 다음에는 스즈키 이치로처럼 공을 치기 위해 타자석에 아니, 책상에 앉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하루에 200자 원고지 15장, 즉 A4용지 한 장반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려고 합니다.
얼마 남지 않는 여생을 잘은 쓰지는 못하지만 글쓰기를 하고 그것을 모아 책이라도 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만 굴뚝 같지 실제는 참으로 딴짓을 많이 합니다. 그 딴짓의 대표적인 것이 티비의 ‘CSI’, ‘시카고 피디’, ‘멘탈리스트’입니다. 이놈의 프로를 보고나면 그 다음에 정작 무언가 하려면 피곤하여 내일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하자고 변명하지만 내일은 대부분 또 다시 반복하고 후회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비디아다르 네이폴(Vidiadhar Naipaul)이 한 말,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선 쓰고 또 쓰는 노력만이 유일한 방법이다’를 액자에 써서 좌우명을 삼기도 했습니다만 그것도 작심삼일입니다.
3년 전인가 과학기술대학 평생교육원의 시창작반 수업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강사이신 박종현 선생님이 시를 쓰는 이유를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속으로 뜨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오래 글을 쓴다고 했지만 한 번도 제가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언제나 저에게는 저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파랑새였습니다.
인생의 황혼 길에 접어든 이제사 어렴풋이 느껴져 오는 것이 있습니다. 한평생 사는 목적은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다음의 생이 있느냐 없느냐는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이승에서 생의 합은 결국 행복감을 얼마나 안고 죽음 저 너머로 건너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행복에 대한 관심이 생기자 자연히 서양의 행복론의 양대 산맥인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가 생각났습니다. 사실 저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감각적 쾌락만 탐닉하는 것으로 치부했기 때문에 천박한 사상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는 중세의 수도사처럼 세상에서 요구되는 욕망을 엄격하게 억제하면서 살아가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지식이 얕은 것은 인터넷을 뒤져보자 금방 탄로가 났습니다.
생명의 주체인 인간의 욕구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의식주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일반 동물의 차원에서도 같습니다. 식욕과 성욕, 그리고 거주하는 주거가 안락할 때 생명체는 평안해지고 쾌락을 느낍니다. 말하자면 에피쿠로스는 이 정도의 쾌락만으로도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욕망의 탐닉자가 아니라 오히려 금욕적, 쾌락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의 과도한 의식주, 명성, 권력 등은 공허한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적으로 보면 이른바 지족안분(知足安分)의 경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는 금욕적이라는 면에서는 일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 연결이 되는 바가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스토아학파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의식주라는 욕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달리 이성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성이 주도하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욕구하는 욕망을 이성이 지배해야 하며 그 이성에 따라서 살므로써 인간은 행복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행복은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이성적인 삶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개인적으로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대해 더 호감이 갑니다.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의 그 엄격하고 혹독함을 제 능력으로는 감당하기에는 버겁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행복 즉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을 느끼는 일은 객관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주관적 영역입니다. 빌 게이츠나 재벌 혹은 당대에 위세를 떨치는 정치가가 가지는 행복의 폭은 평범한 사람의 행복보다는 폭이 넓고 풍부하리라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하고 소박한 행복감이 질적으로는 결코 열등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인생 80,90 살고 갈 때의 의미는 결국은 누가 더 많은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의 기억과 추억을 자신의 속에 쌓고 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것은 저의 글쓰기를 하는 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행복감을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쩌면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합니다. 자그만 글을 쓰고 스스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을 자신의 몸을 느껴야 합니다. 그 행복감을 얻기 위해서라 자판기 앞에 앉아서 집중과 열정을 다해가면서 자신을 행복의 영역으로 몰아가야 합니다. 이제까지 저는 행복이란 하늘에서 어느 날 그냥 떨어지는 복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행복의 광산에 들어가서 곡괭이로 파야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전문 글쟁이도 자신의 루틴(새벽 네 시에 일어나 5,6시간 글 쓰고, 오후에는 운동하는 것)을 반복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면 몰입된 정신상태가 되도록 스스로 몰고 가기 위해 최면 상태로 만든다고 했습니다.
수필 쓰기에 대해서 쓰다가 조금은 옆길로 샌 느낌은 있습니다만 이것이 제 평생에 초라한 글쓰기에 대한 총정리가 될 것도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글쓰기의 요체는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하나는 잘 쓰려고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열심히 하다 보면 자신의 역량만큼 쓰게 되는 것이고 안고수비(眼高手卑), 눈은 높고 손의 못 따라가고 그것은 자신의 능력의 몫이라고 받아들이고 편안해져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글을 쓰면서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처럼, 보람 있는 일을 했을 때처럼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하늘에 달린 홍시가 아니라 스스로 따서 먹고 맛을 음미하고 만족해 하고 평안해지면 되는 것입니다.(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