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현대시에서 정념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이른바 감정이란 것이 어떤 종류가 있나 살핍니다. 그 종류로는 情念(passion), 感情(pathos), 情動(affect), 情緖(emotion), 느낌(feeling)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 다섯 가지 중에서 정념을 대표적인 말로 사용합니다. 전문가의 생각에 토를 다는 것이 무례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다만 저의 생각을 말하자면 passion은 격한 감정을 뜻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pathos는 베토벤의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8번이 'pathetic'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비창’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pathos는 감정보다는 연민이 더 나은 해석이 아닌가 합니다. affect는 애정 이 맞지 않나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은 어쨌든 이 ‘정념’을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에서 어떻게 표출하고 있나 하고 한국의 대표시인 이상, 서정주, 박목월, 김종삼, 김수영, 최승자의 시에서 찾아봅니다.
「오감도」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저는 고등학교 때인가 띄어쓰기도 안 되는 그 모습에 질려서 그 다음에는 이상의 시라고 하면 ‘어렵다’는 인식이 들어 거의 이상의 시는 아예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염경희 교수는 『현대시의 발견과 성찰』에서 시를 읽기 위해서는 화자가 어떤 상태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책을 보고 이상의 가정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4세 때 백부의 종손양자가 되어 친부모를 떠나서 이십여 년만에 부모에게로 돌아옵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곰보였으며 어머니는 고아 출신이었습니다. 이런 가정 환경에서 자란 이상이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나타낸다면 그 정념은 어떤 것이 되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상의 시를 저에게 대표적인 예로 보이는 것을 들어보이겠습니다.
내頭痛위에新婦의장갑이定礎되면서내려앉는다. 써늘한무게
때문에내頭痛이비켜설氣力도없다. 나는견디면서女王蜂처럼受動的
인맵시를꾸며보인다. 나는已往이주춧돌밑에서平生이怨恨이거니와
新婦의生涯를侵蝕하는내陰森한손찌거미를불개아미와함께잊어버
리지않는다. 그래서新婦는그날그날까무러치거나雄蜂처럼죽고죽
고한다. 頭痛은영원히비켜서는수가없다.
「生涯」 전문
화자는 제구실을 못하는 가장입니다. 따라서 그는 가족 내에서 여왕봉처럼 행동하고 신부는 웅봉으로써 가장 역할을 합니다. 그는 전통적인 가족관계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이상의 아내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시는 이런 식이 많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소외라는 정념이 이상에게 있었다는 것보다 제 개인적인 발견이 있었습니다. 시는 엄경희 교수의 말에 의하면 언어의 긴장성, 심미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의 대표적이 예가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시인이 은유을 잘 구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김광규 시인 같은 분은 거의 기교가 없이 평서문으로 시를 구성하여도 훌륭한 시인이라고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은유는 은유를 쓸 수 있는 체질이 따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은유를 구사해보려고 해도 저는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은유를 구사하는 방법으로 원관념A를 구체적 사물명사로 하고 보조관념 B도 구체적 사물명사로 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좀 가지만 A나 B중 하나가 추상명사가 되면 이해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를 저는 이상의 시 「生涯」에서 보았습니다.
‘•내頭痛위에新婦의장갑이定礎되면서내려앉는다⇒신부의 장갑(구체적 사물명사)이 내 두통(추상명사) 위에 정초된다(추상명사)⇒신부의 장갑=원관념 A, 정초된다=보조관념 B
•써늘한 무게⇒‘써늘한’은 형용사이지만 구체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무게는 추상명사입니다. 이둘이 연결되니까 ‘무게‘라는 추상명사가 구체적 사물명사처럼 느껴집니다.
•내頭痛이비켜설氣力도없다⇒두통이라는 추상명사가 비켜서다라는 ‘구체적인 사물동사’(이런말은 문법에는 없지만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동사라고 제가 편의상 지은 말입니다.)와 쓰이니 두통이 사물처럼 취급됩니다.
•나는已往이주춧돌밑에서平生이怨恨이거니와⇒나(원관념 A)는 원한(보조관념B)이다. 전형적인 은유방법입니다.
•新婦의生涯를侵蝕하는내陰森한손찌거미를불개아미와함께잊어버리지않는다⇒내 손찌검은 신부의 생애를 침식한다.⇒내 손찌검(사물명사)은 신부의 생애(추상명사)을 침식한다.
•頭痛은영원히비켜서는수가없다.⇒두통(추상명사)은 비켜선다(구체적 사물 동사)
여기서 저만의 깨달음은 추상명사가 구체적인 사물동사와 연결되거나 구체적 사물 명사가 추상동사와 연결되면 그 추상명사, 추상동사는 사물적으로 변신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은유에 대해 저 나름으로 좀 더 확실하게 머리에 와닿았습니다.
이상의 시는 언어의 긴장성이 극도로 높습니다. 그 예로 ‘내 두통 위에 신부의 장갑이 정초되면서 내려앉는다’를 쉽게 쓰면 이렇게 됩니다. ‘내 머리 아픈 곳에 신부의 장갑이 기초로 잡아정해져 내려 앉는다.’
이걸 추상명사를 사용하면 언어의 긴장성이 증가합니다. 두통 위에 장갑이 정초된다. 즉 구체적 사물명사가 추상명사와 같이 사용되면 언어의 긴장성이 높아지는 것을 특히 이상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시 「火爐에서 ‘화로를꽉잡고집의집중을잡아땡기면유리창이움푹해지면서극한이혹처럼방을 누른다’에서 집중을 잡아땡긴다. 극한이 방을 누른다를 보면 집중, 극한이라는 추상명사가 구체적사물동사와 같이 작동하여 집중, 극한이 사물처럼 취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제가 발견한 것입니다. 제게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서정주의 정념에 대한 기술은 제 기대보는 조금 못했습니다. 저자는 서정주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 있는 시를 가지고 성애를 희극성을 형상화하기 위해 몇 가지 원리를 구사합니다. 연민과 경건성의 제어, 이중의 격하, 기대의 불일치(일탈)가 그 방법입니다. 기쁨, 슬픔, 두려움, 연민, 이런 감정의 상태에 있으면 희극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희극의 시작은 감동이 중지한 그 시점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연민이 있어서는 웃음이 유발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이 현명하고 고상하거나 영웅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과대포장하여 우스꽝스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무언가 부족하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기대의 불일치는 인물의 도덕적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일탈, 합리성으로부터의 일탈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과부가 수절하거나 정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피우며 성애를 나타내면서 그들의 일탈이 희극적으로 보입니다.
읽은 서정주 시인의 시 중에서 한 예를 들어봅니다.
까르띠에 라뗑 ― 소르본느 大學生들의 通學路
여기서 제일 점잖은 분은
물론
프랑스史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라던
몽떼뉴 선생님의 하이얀 大理石像이시옵신데,
하이구, 이것이, 웬일일깝쇼?
그분 두 누깔의 흰창이 모다
핏빛으로 환장한 듯 充血되어 있어서
「이거 웬일이냐?」고 물었더니만
한 소르본느 大學生이 킥킥킥킥킥킥킥
대답입디다―
「입술에 루쥬를 바르고 다니는
소르본느女大生들의 즛이올시다.
試驗點數를 잘 맞게 해달라고
몽테뉴의 모가지에 매달려설랑
누깔에 뽀뽀를 너무 많이 했거든요」……
「까르띠에 라뗑」 전문
사실 이 시를 읽고 피식 웃음이 나긴 했지만 그다지 감동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소르본느 대학여대생들이 시험점수 잘 받으려고 우리로 치면 성황당에 돌 던지듯이 몽테뉴의 눈에 키스를 하다보니 몽테뉴의 눈의 흰자위가 핏빛으로 충혈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서정주의 성애를 나타내는 희극성의 수준은 대략 이 시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정주 시인이라면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의 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무식의 소치로 귀결될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제 개인의 감상은 있습니다. 그가 여기서 취한 언어의 구사에는 그다지 긴장성이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날 얘기하듯이 구수하게 넘어갑니다. 문장들이 계속적으로 사실적인 것만 나열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반전으로 그런 행위는 점수 잘 받기 위해 한 키스였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좋게 말하면 대가의 천의무봉의 경지에 들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제 눈에는 무언가 웃음 속에서도 인생의 깨달음을 주는 그 무엇이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의 오랜 시 작법의 숙련에 의해 시적 맥락은 정확히 짚고 있습니다만.
박목월 시인은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로 불리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시험에도 나오던 인물입니다. 「나그네」라는 시는 그 당시 누구라도 외우지 않았나 싶습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대학생 때는 대학 시 동아리에 들어있던 인연으로 선배님들과 함께 청파동 박목월 시인의 자택을 방문했던 적도 있습니다. 인자한 얼굴에 자근자근 낮은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무어라 가르쳐 주셨지만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연필로 시를 적은 공책을 보여주었던 것은 생각이 납니다.
박목월 시인 하면 청록파, 「나그네」라는 시에서 풍기는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저자는 생활인으로서 박목월 시인의 소심과 정념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시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 소심과 긍지라는 정념은 상상하면 얼마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난한 시인이 시나 수필을 써서 그 원고료로 생활한다면 얼마나 궁핍하겠습니까? 자기가 받은 원고료로 생활을 하고 자식들의 학비를 대려고 하면 언제나 가난에 허덕일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시인은 소심해지고 맙니다. 그런 시의 예를 저자는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소심에만 머물지는 않습니다. 그가 쓴 시로 인해 어쩌면 문학상을 탈 수도 있고 아니 그런 상복이 없다고 해도 스스로 지은 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소심은 긍지로 변모합니다.
좀 길지만 박목월 시인의 시를 하나 인용합니다.
地上에는
아홉켤레의 신발.
아니 玄關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詩人의 家庭에는
알 電燈이 켜질 무렵을
文數가 다른 아홉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地上.
연민한 삶의 길이어.
내 신발은 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屈辱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地上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家庭」 전문
시의 언어가 하나도 모가 난 데가 없고 부드럽습니다. 과도한 은유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정보를 주는 진술만을 배치하여 가난한 시인의 소심의 정념이 ‘미소하는/내 얼굴을 보아라’라고 할 정도로 긍지를 가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종삼 시인의 경우 저는 그분에 대해 친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처음 시랍시고 끄적거릴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시인이었습니다. 은유에 별로 자신이 없었던 저로서는 그저 그림 그리듯이 말을 나열해 놓고는 그 당시는 그것이 유미적이었는지도 모르고 마음에 감동이 왔던 것입니다.
그의 이력은 시만큼이나 특이합니다. 실향민으로 이남에 나와서 동아방송에 취직했지만 평생 단칸방월세 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지독한 애주가로서 나중에는 알콜 중독에 걸려 술을 훔치는 등의 기행도 많았던 분입니다.
저자는 김종삼 시인의 정념은 유미적 표상과 도덕적 감정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시가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는 말에는 동의가 가는데 도덕적 감정이라는 말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종삼의 시에 대해 도덕 운운한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감정이 윤리도덕과 관계가 있다는 게 무슨 말인지요?
우선 김종삼 시인의 유미적 표상으로 가장 자주 거론 되는 시가 있습니다. 「북치는 소년」입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북 치는 소년」 전문
도덕감정--그 근거로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감정론을 제시합니다. 칸트는 이성적 판단에 의해 결정된 의무에 따라서 자신이 행한 행위가 도덕적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칸트는 존경을 이성에 의해 산출된 감정으로 정의합니다. 당연히 존경이 감정인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이제껏 감정의 종류라고 하면 슬픔, 기쁨, 분노, 두려움…… 등을 보았지 ‘존경‘이 감정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습니다. 탁월한 철학자가 말하는 논리니까 일단은 수긍하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김종삼에게 도덕감정, 즉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름다움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여기 「북치는 소년」입니다. 북치는 소년은 내용없는 아름다움이고, 크리스마스 카드이고, 양의 등성이의 진눈깨비입니다.
제가 또 하나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것은 환상성에 대해서입니다. ‘김종삼의 시에 등장하는 미적 공간은 대부분 환상적 느낌을 자아내는 이미지에 의해 구현되는데 이와 같은 형상화 방식은 현실과의 분리를 의미화하는 역할을 한다’(『현대시와 정념』 p194) 그러고 보니 김종삼의 시는 현실과는 괴리된 환상적인 이미지가 많을 것 같습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이런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습니다. 김종삼의 시를 다시 음미하면서 이 환상성이라는 영역으로도 넓혀가고 싶습니다.
이런 예로 저자는 「샹펭」이라는 시를 듭니다.
어느 산록 아래 평지에
널찍한 방갈로 한 채가 있었다
사방으로 펼쳐진
잔디밭으론
가즈런한
나무마다 제각기 이글거리는
색채를 나타내이고 있었다
세잔느인 듯한 노인네가
커피 칸타타를 즐기며
벙어리 아낙네와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까이 가 말참견을 하려 해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샹펭」 전문
이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의 언어가 하나도 긴장을 일으키는 것이 없습니다. 이상의 시는 읽자마자 언어가 주는 긴장을 마주하면서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거의 모든 문장이 평범합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진술에 그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문장―가까이 가 말참견하려 해도 거기가 좁혀지지 않습니다―으로 말미암아 시로 살아납니다. 다른 하나는 시로 살아나는 이 문장의 비밀입니다만 바로 벙어리 부부의 낙원 같은 존경의 세계로 자신은 들어갈 수 없다는 수치심, 죄의식을 노정하는 김종삼 시인의 정념입니다.
김수영 시는 제가 갖는 인상은 그분의 시가 대단히 지적이어서 지력이 모자라는 편인 저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점과 그가 우리나라 참여파의 선구자이다 정도입니다. 물론 어떤 점에서 참여파인지는 구체적으로는 잘 모릅니다.
저자는 김수영 시의 정념을 소외와 설움으로 대변합니다. 그의 소외를 밝히기 위해서는 그의 개인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정말 그의 개인사를 듣고 보니 그의 난해했던 시들이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김수영은 육이오사변때 전쟁이 나자 이남으로 피난을 가지 못해 의용군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나중에 붙잡혀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이 됩니다. 그 동안 그의 아내 김현경은 둘 사이에 낳은 자식을 데리고 선배 이종구라는 사람과 2-3년간 동거생활을 합니다. 김수영이 포로생활에서 나와서 아내 김현경을 받아들이고 가정생활을 영위합니다. 하지만 이 경험은 그의 시에서 소외라는 정념으로 표출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나들이를 갔다 온 씻은 듯한 오늘밤에는 아내를
껴안아도 좋으리
(…)
意志의 저쪽에서 營爲하는 아내여
길고긴 오늘밤에 나의 奢侈를 받기 위하여
어서어서 불을 끄자
불을 끄자
「奢侈」 부분
아내의 일탈을 가정을 위해 용납하였지만 그는 언제나 부부 생활에도 소외라는 정념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내는 자기와는 다른 의지의 세계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부부행위도 그는 ‘사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김수영의 정념을 소외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또 다른 정념인 설움은 잘 이해가 와닿지 않습니다. 설움이란 분하고 억울해서 슬픈 것을 말합니다. 시인은 어떤 것이 원통하다는 것일까요? 그의 시에서 ‘설움’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이런 노골적인 단어를 시인들은 잘 쓰지 않는 게 통례가 아닐까요.
돈 없는 나는 남의 집 마당에 와서
비로소 마음을 쉰다···
(···)
마음을 쉰다는 것이 남에게도 나에게도
속임을 받는 일이라는 것을
(쉰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서)
쉬어야 하는 설움이여
「休息」 부분
생활이 곤궁한 문인으로 살아가면서 돈 있는 친구의 집 마당에서 마음을 쉽니다. 그것은 쉰다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친구보다 못한 것도 없는데 단지 돈 없다는 것 때문에 이런 좋은 집에서 쉰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하여 원통하고 억울합니다. 자기가 인생에서 목표로 한 것을 어떤 연유에서든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누구나 설움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좀 더 이 설움의 원인으로는 아내 김현경을 맞아들인 것이 아닐까요. 그것에서 연유하여 김수영 시의 다양한 정념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김수영의 참여파로서 현실 정치의 타락과 부정의에 대해서 쓴 시편들이 있습니다. 자세히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소외와 설움의 정념을 나타내는 시들보다는 분노의 정념을 그대로 직설적으로 쏟아냅니다. 저로서는 참여시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더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최승자 시인에 대한 사랑의 정념은 대다수의 시인들이 노래하는 사랑에 대한 정념과는 다르다는 점에서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시는 대개 이별의 슬픔, 그리움, 기다림, 외로움 등을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최승자 시인은 오히려 그런 발상에 반발이라도 하는 듯이 반대로 접근합니다. 버림받은 원한, 상대를 죽이고 싶은 욕망과 고독, 직설적이고 전투적인 사랑의 정념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최승자 시인이 문학사적으로 사랑에 대해 통상적인 것과는 다른 스탠스를 처음 취했다는 의미는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자세가 바람직한지는 의문이 듭니다. 사랑한다는 사람을 송곳으로 찔러 죽일 정도로 살의를 느낄 수 있는 걸까요. 연인이 나를 버렸다면 선택한 그길을 가도록 축하는 못해주더라도 방기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은 오고 너는 갔다.
라이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 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해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전문
다섯 시인들의 시적 정념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저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시집을 읽더라고 그냥 막연히 읽을 것이 아니라 그 시인의 실제 생활의 모습과 자신이 시를 통해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정념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저도 이제 제 일생을 지배해 왔던 정념이 무엇이었던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굳이 여기에다 적용해 본다면 박목월 시인의 소심과 긍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