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하기 딱 좋은 사춘기 16 <두근두근 내 인생>도 함께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모은 책 50권을 담아 들고 들어가 독서수업을 한다. 그냥 책을 읽으라고 하면 “만화책 없어요?” 하는 질문이 나오기 일쑤. 그래서 일단 ‘책 경매’를 부쳐본다. 경매라지만 책 소개를 듣고 빨리 손 드는 사람이 책을 먼저 얻어가는 방식이다. “이 책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렇게 시작해 책의 간략한 줄거리나 가치를 들려주다가 재미있는 장면에서 딱 끊고는 “그래서 방울뱀한테 물린 할아버지는 어떻게 됐게? 자, 이 책 궁금하신 분?” 이런 전략을 쓴다. 그 책을 읽겠노라 저요, 저요, 하고 열정적으로 손을 드는 우리 학생들을 보면 언제부터 이들이 이토록 독서에 목말라했나 싶다. 심지어 그 시간에 그 책을 얻지 못한 학생은 도서관에 가서 사서 선생님께 “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있으면 빌려주세요.” 한다니 전략은 성공적이다.
표지의 예쁜 여학생은...
특히 이 책, <두 번째 달, 블루문>은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표지의 예쁜 여학생 그림을 보고 ‘저요’를 외치는 아이들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고3 여학생이야. 여러 가지 힘든 가정사정이 있지만 그건 생략. 이 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둘 다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자고 서로를 격려하며 아름답게 이성교제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주인공이 그만! 임신을 하고 말았어!” 그러면 교실이 난리가 난다. 꺄악~, 헐~, 어머나! 했네, 했어, 뭐가 그렇게 좋냐, 인마, 등등..... 그리고 또 저요, 저요, 손들이 올라간다.
“여기서 잠깐. 책 이야기는 잠깐 멈추고 질문. 여러분, 여러분이 여자 친구랑 사귀다가 친구가 임신을 했다고 가정해 봐요. 친구가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배가 불러오니까 못 다니겠지요. 휴학하면 되지요.”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이 친구가 학교에 가서, 저 선생님~ 제가 임신을 했는데 잠시 휴학하고 아이 낳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 아, 그래? 출산 잘하고 몸조리 잘하고 돌아오렴, 할까요? 아니요, 이 학생은 어쩌면 학교에서 징계를 받을 수도 있고요, 만약 징계를 받지 않는다 해도 미혼모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학업을 계속하기 어렵겠죠.”
미혼모는 있어도 ‘미혼부’는 없는 세상, 임신이 여학생의 학업 중단의 결정적 이유가 될지라도 그 아기의 아빠인 남학생의 학업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현실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요즘 20대뿐 아니라 남자 중고생들까지도 ‘남자가 더 차별받는 사회’라 억울하다고 토로하는 세상이라지만 남자 중학교인 우리 학교 열다섯 살 소년들은 입을 모아 외친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네가 만약 ‘미혼부’가 된다면
우리는 여고생 미혼모가 겪는 학업 중단과 미래에 대한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겨우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은 ‘낙태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여성이 낙태를 했을 때 몸으로 져야 하는 부담과 심리적 아픔에 대해서도.
만약에 아기를 낳는다면 육아와 생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 여자 친구가 살아갈 일뿐 아니라 태어난 아기의 슬픔은 어찌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목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주인공 수연은 그 자신이 엄마에게 버림받아 내내 엄마를 원망하며 살아왔지만 스스로가 낳기 어려운 아기를 잉태하면서 엄마가 자기를 품었을 때 가졌을 고민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태껏 가졌던 엄마에 대한 원망 대신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 준 것에 감사해하며 그것을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에 대한 성찰로 잇는다. 아마도 ‘두 번째 달’은 주인공의 아기를 뜻하는 것이리라.
나는 나의 소년들에게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건가요?” 묻는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지혜롭게 연애를 하기 바란다고,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책 속의 지호처럼 도망가지 말라고, 끝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대책을 세우고 여자 친구와 함께 나란히 서 있으라고, 진심을 다해 이야기한다. 시시덕거리던 아이들 눈빛이 깊어진다.
<두근두근 내 인생>
아주 오래전, 중1 담임을 할 때였다. 늘 그렇듯 그 해에도 두레 일기(모둠으로 친구들과 함께 쓰는 일기)를 썼다. 중2를 오래 맡다가 오랜만에 중1 담임을 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해 아이들은 유독 귀여웠던 것 같다.
“너희는 '기품 있는 열네 살'이야. 건방지지 않지만 도도하고 기품 있는 표정을 지어 봐, 얘들아.” 이렇게 요구하면 그들은 정말 눈빛을 반짝이며 총명한 소년의 표정을 짓는다. 사실 중1이면 마냥 어리기만 한 건 아니란 것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상냥한 웃음과 다정한 몸짓 뒤에 교활하고 이기적이고 사악하고 음란한 사춘기 소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차피 다는 알 수 없는 저들의 속을 다 아는 척하느니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들을 대할 뿐이다.
그때 쓴 것 중 중1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어른스러운 학생의 일기가 있었다.
요즘 우리 반 찬현이는 아이들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왜 살까, 라며. 나는 대답 대신 묻는다. “너는 살면서 어떤 느낌을 받는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이다. 정확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싶으면 죽어 보라, 죽고 나면 왜 사는지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해야겠지.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그대들이 떠들어대는 하나님 부처님은 어디로 갔는가?
사뭇 철학적이다. 친구의 질문을 인용했지만 자신의 삶에 태도에 대해 스스로가 깊이 있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렇게 사춘기를 맞아 ‘죽음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사는 걸까?’를 고민하는 학생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여기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다
김애란의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죽음으로 걸어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다. 주인공 아름이는 열일곱의 마음으로 여든의 몸을 견뎌야 하는 ‘조로증(빨리 늙는 병)’에 걸린 소년이다. 부모보다 일찍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소년이 주인공이지만 소설은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죽어가는 소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소년이 태어나게 된 이야기가 더 생동한다. 열일곱에 일찌감치 아기 엄마 아빠가 되어버린 맑고 천진한 영혼들의 이야기.
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몸이 아름다운 인격을, 아름다운 얼굴이 아름다운 영혼을 만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건강한 몸이 영혼조차 활력 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름이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나이 든 영혼의 지혜와 너그러움에 십 대의 생명력을 함께 지닌 아름이, 조금은 귀엽고 천진했던 자기 부모들의 10대 시절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글로 쓰고 싶어 했던 그 소년을 보면.
열일곱 나이에 일흔 살의 육신을 지닌 아름이는 지금 30대인 자기 부모보다 일찍 죽을 것이다. 그것을 아름이도, 아름이의 부모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다가오는 죽음에 절망하기보다 오늘의 햇살을 즐긴다. 그리고 서로를 충분히 사랑한다. 이런 삶의 자세는 머리로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생명 가진 이들은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이 우주가 준 과제인가 보다, 싶다. 이것이 ‘왜 사느냐’는 사춘기 소년의 질문이 충분한 답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머리로만 생각하기보다 온몸으로 열심히 생명의 의무를 다하는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