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들의 방

영화 <베스트 오퍼>

by 청아

세계 최고의 미술품 경매사. 그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 줄 몰랐다.

그는 자신만의 방에 수많은 여인들의 초상화들을 빼곡히 걸어놓고 그 가운데 앉아 집 밖에서는 굳게 싸매고 있던 자신의 마음을 잠시 풀어놓곤 한다. 초상화 속 여인들은 그에게 연인 혹은 동반자였고, 엄마였고, 딸이었으며, 친구였을 것이다.


초상화 속의 여인들은 늘 아름다웠다. 변하지 않았고, 실망시키지도 않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질투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 주도권은 언제나 그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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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사의 아주 사적인 공간은 오랫동안 나의 내면에도 존재해 왔던 바로 그 방이었다.


사춘기에 들어설 때 즈음 잘못 받은 치아 교정으로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진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이상하게 늘어나버린 턱과, 턱이 길어지면서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좁아진 이마의 비율은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도무지 엉터리였다. 근시는 빠른 속도로 심해져서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써야 했는데, 그 뒤로 깜빡거리는 두 눈은 작디 작았다.

어떤 머리 스타일을 하면 좀 나을까를 고민해 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어 그냥 묶기로 했다. 머리를 풀면 안 그래도 긴 얼굴이 더욱 길어보여서 보는 이들이 답답해 했기 때문이다.

같은 반 아이들이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못생겼냐고 물어올 때면 나는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곤 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 나를 뜨겁게 사랑할 남성이 있을까.


나는 슬픈 마음으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 자신조차도 나를 좋아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좋아했던 남자 아이가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지는 나 스스로가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는 하나의 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내 안의 방은 수많은 아름다운 남성들의 초상화로 가득 찼다. 금성무, 클라크 게이블, 조인성, 강동원… 그들은 말없이 나의 고독을 달래는 가상의 연인들이었다.


그들의 실제 삶이 행복한지 불행한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는 그저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나의 로맨스 욕구를 채워줄 아름다운 초상화들이 필요했다.


방에 아무리 많은 초상화를 가져다 걸어 놓아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를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초상화들은 나에게 상처주는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를 채워주는 일도 없었다.

초상화들이 있으나 없으나 나의 마음이 외롭고 고단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나는 틈만 나면 그 방에 가서 앉아 있었다. 영화 속 미술품 경매사가 그랬던 것처럼.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혼자만의 방 안에 앉아만 있어서는 그 어떤 관계도 만들어갈 수 없었기에,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 나는 용기를 내어 나의 방으로부터 걸어나와야만 했다.


왜 내가 수십년을 그래왔던 것처럼 그의 초상화 또한 나의 방 안에 걸어두려 하지 않았는지는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그를 내 마음에 합한 그림으로 만들어 아무렇게나 소비해 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나의 사랑을 주고 싶었다.


그에게 나의 베스트 오퍼(경매에서 제시하는 최고 가격)인 나의 심장을 건넨 건 나 스스로가 원해서 했던,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

베스트 오퍼의 순간에 나의 진짜 삶이 시작될 줄은 알지 못하고 선택한 일이었다.


그의 것이 된 나의 마음은 그 새로운 여정을 경험해 갔다.

그로 인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쁘기도 하고,

그와 마찰이 생길 때면 세상의 불빛들이 온통 꺼져버린 듯 느끼기도 하고,

그를 위해 하는 모든 수고가 아깝지 않아지고,

그와 함께 웃는 웃음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보석들이 되어 나의 보석함에 쌓여갔다.


상처받기도 하고, 관계를 위한 고민도 해야 했고, 적지 않게 힘겨울 때도 있었음에도,

나는 매 순간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었다.


나를 살아나게 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그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기꺼이 내준 나의 베스트 오퍼였다.


아무리 많은 초상화들을 가져다 놓아도 채워지지 못한 채 비워져 있던 나의 마음은

누군가를 사랑하겠다고 진심으로 선택할 때에만 채워졌다.

나의 내면을 채우는 건 아름다운 남자들이 아니라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


미술품 경매사의 화려한 방을 보았던 날, 나는 오랜만에 나의 방을 찾아가 보았다.

그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한 사람의 초상화도 남아있지 않았다.

베스트 오퍼를 하면서 스스로 채워진 나의 마음에 더 이상 초상화는 필요 없어진 것이었다.


나는 방의 불을 끄고 방 밖으로 나와 등 뒤로 방문을 닫았다.

이제 이 방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나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내민, 단 하나의 진심.

그것이 나의 베스트 오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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