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다 (7)

김종직의 제자들이 과거 시험에서 3번 연속으로 장원을 차지했다

by 두류산

7장


김종직은 백성들이 세금을 낼 때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공정한 조세부담에 힘을 기울였다.

‘바르고 공정한 정치를 하려면, 온 고을 백성을 살피기를 하늘의 해가 차별하여 비추지 않듯이 고루 살펴야 한다.’

경상 병마평사 시절에 목격한 아전의 횡포를 막기 위해, 백성들에게 수확량을 기반으로 세금을 거둘 때 아전들이 관(官)에서 허락한 비율 이상을 절대로 거두지 못하도록 했다.


하루는 세정을 담당하는 향리가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뇌물을 받고 수확량을 적게 신고한 것을 눈감아준 일을 발견하였다. 이들에게 적게 받으면 백성들이 더 부담해야 했다.

‘향리의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하여 부정을 방지하는 것이 수령칠사에도 명시한 고을 수령의 임무가 아닌가.’

김종직은 향리와 지방 토호가 서로 짜고 부정을 저지르고자 하는 욕구를 근원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함양 땅을 한눈에 보면서 세정을 펼칠 수 있는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김종직은 병마평사 시절에 경상도 지도를 제작한 경험을 살려 함양의 지도제작에 착수하였다.

"천하에는 천하도가 있고 한 나라에도 국도(國圖)가 있듯이, 고을에는 고을도가 있어야 한다.”


궁벽한 시골에서 지도제작에 익숙한 장인(匠人)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김종직은 경상 병마평사 시절에 지도를 제작했던 경험을 살려, 화공(畵工)과 함께 함양의 산과 강을 답사하였다. 지도에 집과 사람의 숫자, 곡식이 생산되는 전답의 상세한 면적 등의 필요한 기록도 화공에게 추가하여 그리게 하였다.

김종직은 문득 세조가 자신을 나무랐던 일이 생각났다.

‘잡학을 배우는 것이 천하고 비루한 일이라고 하나, 나라와 백성들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잡학은 백성들의 생활에 중요하여, 임금인 나도 뜻을 두는 바인데, 네가 이렇게 가볍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

김종직은 세조가 문신도 잡학을 공부하라는 뜻을 점점 더 알 것 같았다.


김종직은 완성된 지도를 동헌에 걸어 놓고, 그것을 보면서 업무를 보았다.

"지도를 보아라! 박 생원이 가진 논의 면적이 최 진사가 가진 논보다 두 배나 넓은 데 어찌 세금은 같은가?”

김종직은 부정이 드러난 아전을 옥에 가두었다.

그날 밤 유자광의 장인인 박치인이 찾아왔다. 박치인은 오랫동안 함양에서 호장(戶長)을 하여, 고을에서 세(勢)를 이루고 있었다. 유자광이 나라의 공을 세워 공신이 되자, 향역을 면제받고 은퇴하였으나 아전들은 여전히 그를 따랐다.


김종직은 박치인을 맞이하며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소?”

박치인은 김종직에게 고개를 조금 숙여 가볍게 예를 표하고 말했다.

"지금 옥에 들어가 있는 박가가 저의 조카이고 유 정승에게는 처사촌이 됩니다. 헤아려 살펴주시지요.”

박치인은 재상이 된 사위 유자광의 권세로 가슴에 헛바람이 잔뜩 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김종직은 박치인을 돌려보내며 말했다.

"알겠소. 이 일을 잘 살펴 처리하겠소.”


다음날 김종직은 아전을 엄히 문초하여, 그동안 부정으로 받은 뇌물을 모두 밝혀내었다. 김종직은 아전의 죄를 물어 장(杖)을 치게 하고, 착복한 뇌물은 모두 국고에 환수시켰다. 이로써 아전들은 함양에서 제일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김종직은 고을의 지도를 통해 토호나 향리의 결탁과 속임을 막고, 백성에게 세금을 공정하게 거두는 지표로 삼았다. 지방의 호족들이 생산량보다 세금을 덜 내어 생긴 부족분을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부당한 세 부담을 줄여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가혹한 세금과 굶주림으로 여러 고을을 떠돌던 많은 유민들이 다시 고향을 찾아 돌아왔다.


김종직은 고을 수령으로 함양에서 민생을 보살피면서, 공자가 노나라의 중도(中都)에서 고을 수령으로 일한 일을 생각하였다. 공자가 고을을 다스리자, 맡은 지 일 년 만에 중도는 예의와 윤리의 기틀이 잡혀 다른 고을이 모두 본받을 정도로 질서가 잡히고, 도둑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김종직은 공자가 지방의 수령 시절에 이룬 업적을 본받고 싶었다.


김종직은 고을 수령으로서 풍속을 교화하여 인륜과 도덕이 바로잡힌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수령칠사의 하나인 학교를 일으키고 학문을 권장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향교를 중심으로 유생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며 덕성 함양을 강조하였다. 또한 미신과 무당을 타파하고 고을에서 성황당을 철폐하였다.

‘군왕을 대리하여 이 고을에서 왕도정치를 이루려면 먼저 민생을 안정시키고 나아가 효제(孝悌, 효도와 우애)와 같은 유교 윤리가 백성들에게 스며들도록 하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김종직은 봄과 가을에 고을 잔치인 향음(鄕飮), 향사(鄕射)와 양로연 등 지역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행사를 개최하여 인륜의 질서가 바로 잡힌 고을 풍속을 만들어 나가고자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함께 술을 마시는 향음과 함께 활을 쏘는 향사 등 고을 잔치를 벌일 때는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우애가 좋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향음과 향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품행이 온 고을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풍속을 교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김종직이 시간을 내어 함양의 유생들을 가르치자, 소문을 듣고 선비들이 멀리서도 와서 들었다. 김종직은 명성을 듣고 각지에서 찾아오는 선비들을 흔쾌히 제자로 받아들여 인재로 키워나갔다.

"공자도 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제자를 키웠다. 공자에게 배운 제자들이 대를 이어 세상을 바꾸어 나갔다.”

김종직은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학문인 도학(道學)을 유생들이 제대로 배워 도학의 기운을 왕성하게 한다면 나라의 관습과 풍속이 밝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함양의 민생을 보살피는 데 여념이 없는 김종직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어린 나이로 제자가 되었던 김흔이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험에 장원으로 뽑히더니, 이어서 과거에도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함께 기뻐했다.

"제자들이 과거시험에서 3번 연속으로 장원급제를 하였으니 이보다 경사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감축드립니다.”


김종직은 이른 나이에 장원으로 급제한 제자에게 축하와 함께, 벼슬길에 나서도 겸손과 도(道)를 잃지 말라고 격려하는 편지를 썼다. 김종직은 밤이 이미 깊었지만 김흔의 형인 김심에게도 따로 편지를 썼다. 동생은 합격했는데 과거에 오르지 못하여 실망하고 있을 제자에게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주는 편지였다.

김종직은 제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조정의 흐린 물을 맑게 하려면 도학(道學)을 아는 인재들이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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