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다 (8)

도학을 배운 제자들이 조정에 가득하면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하지 않겠나

by 두류산

8장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효행으로 이름을 떨치던 표연말과 정여창이 함양에 살고 있었다. 김종직의 제자가 된 표연말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승의 가르침대로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상(喪)을 치렀다.

《주자가례》는 주자가 가정에서 지켜야 할 관(冠)·혼(婚)·상(喪)·제(祭)에 관한 예의범절에 관해 저술한 책이었다.

표연말은 무덤가에서 3년 시묘살이를 마친 뒤 형제들과 유산을 나누는데, 형들이 젊고 힘센 노비를 차지하려고 하자, 표연말은 형들을 설득하였다.

"어머니는 평상시에 이 노비를 여동생에게 줄 생각이었는데, 차마 그 뜻을 저버리겠습니까?”

표연말은 자신이 먼저 늙고 힘이 약한 노비를 취하니, 형들이 부끄러워 감히 논박하지 못하였다.


정여창은 어린 시절 부친이 의주에 부임하여 따라갔는데, 명나라 사신이 의주에 들렸을 때 여덟 살의 소년을 보고 영특함을 칭찬하여, ‘너(汝)의 가문을 창성(昌盛)하게 할 인물‘이라는 뜻으로 '여창(汝昌)'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시애가 함길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무관인 아버지는 출전하여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당시 18세의 나이였던 정여창은 이 소식을 듣고 부르짖으며 애통해하였다.

난(亂)이 평정되자 함양에서 수천리 길인 함길도로 가서 전쟁터를 돌며 부친의 시신을 찾아 나섰다. 마침내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인 함양까지 모시고 돌아와 예법에 따라 장사를 지냈다.

부친이 이시애 난의 공신으로 인정되어, 세조는 아들에게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정여창은 사양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들이 나라의 은혜를 받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바입니다.”

정여창은 고향인 함양에서 자연스럽게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다. 정여창은 호를 ‘한 마리의 좀 벌레’라는 뜻의 일두(一蠹)로 짓고,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여 김종직이 특별히 사랑하였다.


한양에서 제자들 여러 명이 함께 천릿길인 함양에 있는 스승을 찾아왔다. 김종직은 정여창, 표연말, 조위, 유호인 등을 지도하다가, 제자들이 내려왔다는 전갈을 받고 기뻐하며 달려 나가 맞았다.

"길이 험할 터인데 궁벽한 이곳까지 내려오다니!”

스승과 제자들은 오랜만에 만나 손을 맞잡고 감격하였고, 제자들은 스승에게 예를 다해 절을 올렸다. 제자들 중에 제일 연장자인 김맹성이 스승을 보고 눈시울을 붉히며 인사했다.

"작은 스승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글을 읽다가 의문이 생기면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스승님이 가까이 안 계시고 멀리 계신 것이 실감이 났습니다.”

김맹성은 김종직보다 여섯 살 아래의 나이로, 원래 아버지 김숙자의 문인이었다. 나중에 김종직과 같이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김종직에게 물어서 해결하여, 김숙자를 큰 스승으로, 김종직을 작은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다.


김맹성 다음으로 두 번째 연장자인 신영희도 거들었다.

"책을 읽다가 의문사항이 생겨 스승님께 안부도 물을 겸 편지를 보내면 답을 받는데 두 달 이상이 걸리니, 책을 계속 읽을 수도, 다른 책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김종직도 유쾌하게 웃으며 두 사람과 함께 내려온 강경서, 강백중, 정석견, 정성근의 손을 잡고 반겼다.

김종직은 제자들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권하며 물었다.

"한양에는 별고가 없는가?”

김맹성이 탄식하며 말했다.

"한양은 공신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김종직도 대개 들은 바가 있어 말했다.

"좌리공신(佐理功臣)을 말하는 것인가?”

좌리공신은 어린 성종을 ‘좌우에서 돕고 다스림을 보좌’하여 인심이 안정되고 국가가 태평해졌다는 공로로 책봉된 공신들이었다.


김맹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 임금의 정치를 잘 보좌했다고 공신이 됩니까. 대신들이 녹을 받고 하는 임무가 임금을 보필하여 정치를 잘 보좌하는 게 아닙니까. 세종대왕께서 33년 동안에 태평스러운 정치를 이룩하였으나 이른바 좌리공신이란 칭호가 없었는데, 주상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공신이 일흔네 명이나 새로 생겼습니다. 이들이 과연 무슨 공(功)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석견이 김맹성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태평한 시대에 공(功)을 논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세종대왕의 태평한 조정에서도 공신이 없었는데, 지금 조정의 대신들이 무엇을 했다고, 공신이 되어 토지와 노비를 더하겠습니까?”


신영희가 열을 내며 비꼬았다.

“주상이 임금이 되신 것이 아직 3년이 안되었는데 일흔네 명의 신하에게 공신 칭호를 주었으니, 세종대왕 30여 년 치세에는 열 배인 칠백사십 명의 공신이 나와야 했겠습니다.”

김맹성이 말을 더했다.

"우리보다 수십 배의 땅을 가진 중국에서도 공신 칭호를 받는 신하들은 매번 이십여 명에 불과하고, 조선이 개국할 때의 공신도 오십여 명인데 한꺼번에 칠십 명이 넘는 공신이라니......”


신영희가 다시 나섰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이래로 지난 20년 동안 다섯 차례의 공신 책봉이 있었고, 공신이 된 인물만도 2백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 치고 공신이 아닌 사람은 과거에 합격한 신진 관리 외는 거의 없는 셈입니다.”

김종직은 제자들의 좌리공신들을 성토하는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들이 내려오면서 이에 대한 토론이 많이 있었던 게야.’


김종직이 제자들의 마음을 알고 말했다.

"조정의 대신이라는 사람들은 극구 사양도 안 하고...... 염치는 다들 어디에 두었는가?”

김맹성이 분통을 터뜨렸다.

"더구나 지금은 해마다 기근이 들어, 고향을 떠나는 백성들이 늘어나 주상의 근심을 끼치는 판에 대신들의 공(功)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옛날에는 재이(災異)때문에 정승들이 사직하기도 하였는데, 도리어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고 토지와 반인(伴人)과 말을 더하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김종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하긴 기근이 극심하여 백성들의 고초가 말이 아니네. 함양은 비록 조금 나아졌지만, 경상도 전체로는 최근 계속되는 기근으로 굶어 죽는 백성이 금년에만 칠천 명 이상이라고 들었네.”


신영희가 스승을 보며 말했다.

"사람들은 정치를 잘해서 공신이 되는 경우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는 일이냐고 말하면서, 이것은 택군(擇君)의 공이라는 것입니다.”

김종직은 놀라 물었다.

"택군이라니?”

"한명회와 훈구대신들이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을 제치고 자산군을 지금의 주상으로 선택했으니 그 공을 보답하기 위해 주는 공신 칭호라는 겁니다.”


신영희는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임금을 선택하여 옹립했다는 오만함으로 공신 칭호를 받기를 사양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김종직은 얼굴이 상기되었다.

‘한명회와 훈구대신들은 어린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게 하고 심지어 어린 왕을 죽이도록 까지 하더니, 그런 불온한 기운이 십 년이 지났는데도 계속되는 건가.’


김종직은 제자들을 돌아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역사는 거울처럼 지난 시대를 비추는 것이네. 훗날 누군가가 우리의 행적을 낱낱이 평가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누구든 각자의 자리에서 올바르고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정여창이 스승에게 물었다.

"왜 벼슬아치들이 명예와 재물을 탐내어 역사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는 것입니까? 성현의 말씀을 배웠고, 녹봉을 받아 배를 곯지는 않을 텐데 무슨 조화입니까?”


정여창이 본질적인 질문을 하자 좌리공신을 규탄하던 제자들도 조용히 스승의 입을 주시하였다. 김종직은 좋은 질문을 한 정여창을 대견하게 여기며 말했다.

"덕이 깊은 사람이라도 어찌 인간적 욕심이 없을 수 있겠느냐, 또한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덕적 본성이 없을 수 있겠느냐.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간적 욕심인 인심(人心)과 도덕적 본성인 도심(道心)이 섞여 있는 법이네. 이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눈앞의 욕구를 이길 수 없게 되는 것일세.”


정여창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제대로 다스려 역사에 맑은 이름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욕심을 이겨내려면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을 늘 살펴서 둘이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하네. 인간적 욕심이 일어날 때마다 도덕적 본성의 명(命)으로 눌러야 하네. 이를 위해 중단 없는 수양이 필요하고, 수양을 통해 변함없이 도심(道心)이 이탈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네.”

김종직은 정여창의 맑은 눈을 보며, 문득 경복궁 경회루에서도 비슷한 강의를 한 것이 생각났다.

김종직은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관리가 되어 인간적 욕심을 어떻게 다스렸느냐에 따라, 역사에 충신 혹은 간신으로, 청백리 혹은 탐관오리로 기록될 것이네.”


제자들은 오랜만에 스승을 만나 각자 가지고 있던 의문점을 물어 해소하기도 하고 그동안의 회포를 푸느라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제자들은 함양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스승에게 한유의 문장과 두보의 시를 배웠다.

한유는 중국 당(唐)을 대표하는 문장가와 사상가이며,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다. 두보는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시성(詩聖)이라 불리었다.

제자들은 스승의 지도 아래 함양에서 공부하고 있는 선비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정여창, 표연말, 유호인, 조위 등은 자신들과 비교하여도 학문 수준이 높아 자극이 되었다. 함양을 떠나는 날 제자들은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좋은 소식을 올리겠다고 다짐하며 스승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신영희가 작별인사를 하면서 김종직에게 마음속에 간직한 말을 꺼냈다.

"스승님, 저는 글은 계속 읽겠지만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하기는 싫습니다.”

김종직은 신영희를 보니 예전에 아버지에게 과거를 보지 않겠다고 말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김종직은 신영희에게 조용히 말해주었다.

"도가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백로가 까마귀 노는 곳에 섞이기 싫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네. 하지만 조정의 흐린 물을 맑게 하려면 도학(道學)의 가르침을 배운 새로운 물이 조정에 계속 공급되어야 하네.”


김종직은 천릿길을 다시 올라가야 하는 제자들을 배웅하면서 염원했다.

"도학(道學)을 배운 그대들이 벼슬길에 오르고 장차 대신이 되는 날에는 조정은 군자의 기운이 가득한 곳으로 바뀔 것이네. 그렇게 되면 그대들의 맑고 굳센 기운으로 대동사회를 이 땅에 실현하여, 백성들과 더불어 잘 사는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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