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근무평점자, 함양군수 김종직 (2)

함양에서 나지도 않는 차(茶)가 특산물이 되어 공납품이라니......

by 두류산

함양에서 나지도 않는 차(茶)가 공납품이라니


1470년 성종 1년 12월.

김종직은 낙향하여 일흔을 넘긴 모친을 가까이서 봉양을 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살고 싶다는 소망으로 임금에게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임금은 조정의 선비들 중에 김종직만 한 학문과 문장이 없다는 이유로 ‘불가(不可)하다’고 답을 내렸다.


김종직은 사직상소를 다시 올렸으나 또 거절당했다. 멈추지 않고 연로한 어머니의 봉양을 내세우며 거듭하여 세 번째 사직을 청하였다.

임금은 사직은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에 고향과 가까운 함양군수로 나가게 허락하였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가게 되자, 신숙주가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김종직과 같은 인재가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된다니,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로다.”


성종은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받아 하직인사를 온 지방관들에게 수령칠사(守令七事)를 강조했다. 성종 3년 2월 25일 실록의 기록은 이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날 성종은 지방 수령으로 내려가는 신창 현감 김숙손을 불러 만났다. 임금이 수령칠사를 물었으나, 김숙손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인 채로 바닥만 긁고 있었다. 성종은 곧바로 김숙손의 임명을 취소하였다.

"비록 칠사(七事)를 안다 하더라도 오히려 백성을 잘 다스릴 수가 없는데, 더구나 알지 못함이랴! 벼슬을 바꾸어라.”


수령칠사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의 통치에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이었다. 그 내용은 ‘농업과 잠업을 장려하고’ (농상성: 農桑盛), '인구를 늘리며' (호구증: 戶口增, ‘학교를 일으키고’ (학교흥:學校興), ‘군사에 관한 정무를 안정시키며’ (군정수: 軍政修), ‘부역을 균등하게 하고’ (부역균: 賦役均), ‘소송을 빨리 진행하며’ (사송간: 詞訟簡), ‘향리의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하여 부정을 방지함’ (간활식: 奸猾息)의 일곱 가지였다

김종직도 함양으로 내려가기 전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며, 수령칠사(守令七事)를 마음에 새겨 국왕을 대신하여 백성을 잘 살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김종직은 지리산 아래의 작은 고을인 함양에 수령으로 부임하여, 고을의 재정을 담당하는 호방(戶房)으로부터 나라에 바치는 세금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함양에서 대궐에 바치는 지방 특산물인 공납품(貢納品) 가운데 차(茶)가 들어 있었다.

공납은 왕실이나 중앙 관청에서 필요한 특산물을 공물(貢物)로 지정하여 전국 각 군현이 납부하게 하는 것이었다. 공물은 토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조세와 함께 나라의 주요 재원으로, 백성들에게는 가장 무거운 부담이었다.


김종직이 함양에서 차가 얼마나 수확되는지 물으니, 호방은 함양에서 차는 한 홉도 구할 수 없다고 답했다. 김종직이 놀라, 나지도 않는 차를 어떻게 대궐에 올리느냐고 물으니, 차가 나는 전라도에 가서 차 한 홉에 쌀 한 말의 값으로 비싸게 차를 사들여서 대궐에 올린다고 보고를 받았다.


김종직은 차를 얻기 위해 함양에서 수확한 엄청난 쌀이 필요하고 이것을 모두 백성들에게 해마다 부과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왜 조정에 사실을 아뢰어서 바로잡지 않았는지 물었더니 예전의 군수들도 관찰사를 통해 이를 고쳐줄 것을 사정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호방이 답했다.


실제로 이웃 고을은 호랑이 가죽 수십 장을 공물로 바쳐야 해서, 포수를 동원해 온 산을 뒤졌지만 그 많은 호랑이를 찾지 못했다. 결국 강원도나 함길도에서 비싸게 호랑이 가죽을 사 와서 대궐에 올리는 형편이라고 했다. 조정의 관리들은 정해진 법을 쉽게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김종직은 아예 함양에서 나지도 않는 비싼 차를 사기 위해 많은 곡식을 내놓아야 하는 백성들을 생각하니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이가 많고 명망이 있는 고을의 어른들을 만나 함양에서 차를 생산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신라 때 당(唐) 나라에서 차의 종자를 얻어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김종직은 그 말을 듣고 신라시기에 남긴 차나무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다. 실지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구해 읽고 고을 어른들의 말을 확인했다. 김종직은 기뻐하며, 기대를 가지고 관내 지리산 근처에 사는 거주민들을 찾아 차나무를 탐문하였다.


백성들도 고을 원님의 성의에 감동하여 차나무를 찾아 열심히 지리산 잡목 더미와 대나무밭을 수색하였다. 마침내 지리산 기슭에 있는 사찰인 엄천사의 북쪽 대나무 숲 속에서 두 그루의 차나무를 발견하였다.

차나무를 발견한 부근은 모두 백성들이 소유한 토지였다. 김종직은 대밭과 주변 밭을 모두 사들여 차를 재배하는 밭으로 만들었다.


몇 해가 지나자, 차나무가 제법 번식하여 대궐에 바칠 수량을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김종직은 푸르게 자란 차밭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붓을 들었다.


'신령한 차 모종 받들어 성군(聖君)께 드리려고

신라시대에 살던 종자 오래 찾지 못하다가

드디어 지리산 아래에서 캐어 얻었기에

우리 백성 부담 한 푼이나마 덜어 기쁘네.'


김종직이 관영 다원(官營茶園)을 조성해 백성들의 공납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한 적극적인 민생대책은 백성들을 감동시켰다. 이 일은 지방수령들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일로 사람들의 입에 널리 오르내렸다.


(다음 편에 계속)





(일러스트 출처)

https://blog.daum.net/inseung/6015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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