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 백성이 어버이처럼 따르고, 유민들이 다시 돌아오다
지리산과 함양 일대에 폭설이 내렸다. 함양 군수 김종직은 그칠 줄 모르고 함박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함양읍성 누각의 지붕이 폭설에 무사할지 걱정이 되었다.
성 둘레를 따라 줄지어 지어져 있는 누각의 지붕은 초가로 되어 있어서 여름에 폭우가 쏟아지거나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손상을 많이 입었고, 그때마다 복구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함양읍성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관아가 불타자, 관아를 옮기고 흙을 쌓아 다시 성을 쌓은 것이었다. 성의 길이는 735척이고, 성 둘레를 따라 지은 누각은 243칸이었다.
눈이 그친 후 김종직은 아전들과 함께 읍성을 살펴보니, 성 둘레를 따라 줄지어 있는 초가로 된 누각의 지붕이 엄청나게 쌓인 눈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크게 파손되어 있었다. 누각의 초가는 여름의 강한 비바람에 버티기도 어렵지만, 겨울의 큰 눈에도 내려앉아버리니 지붕의 볏짚을 새로 덮는 일이 연례행사가 되었다.
누각의 지붕을 고치려면 비록 농사철이라 할지라도 소를 논밭에 사용하지 못하고 볏짚과 목재를 실어 나르는데 투입해야 했다. 겨울의 눈바람에도 자주 내려앉아 농사가 한창 바쁜 봄철에 수리를 해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김종직은 연례행사로 누각의 지붕 수리로 인한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려면 초가지붕을 아예 기와지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와로 지붕을 하면 해마다 지붕을 손질하는 수고는 면하고 편안히 농사만 지을 수 있지만 당장 기와에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 문제였다. 김종직은 신망 있는 고을의 어른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두루 들었다. 그들은 차 공납 문제를 해결하여 세금 부담을 줄여주는 등 애민정신을 가지고 고을 일을 보는 원님의 열의에 호의적이었다.
김종직은 고을 어른들의 호응에 크게 기뻐하며, 243칸 누각의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대체하기로 결단하였다. 김종직은 함양 주민들의 빈부(貧富)를 살펴 기와와 인력 징발의 기준을 가호(家戶)로 하지 않고 토지보유와 성인 남자의 수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기와가 순식간에 걷히고 고을 장정들이 적극 나서, 공사가 예정보다 빨리 완공되었다.
기와 누각으로 바꾸니 해마다 백성들을 동원해서 누각을 수리해야 하는 불편과, 농사철을 앞두고 부역에 나서야 하는 고을 사람들의 부담이 사라져 버렸다. 김종직은 공사가 완공되자, 감격하여 붓을 들어 시로 남겼다.
'이백 사십여 칸 누각 건물을 비바람과 폭설에 해마다 수선해야 하니
어려운 형편에 백성들의 동원을 염려하였네.
새로운 공사가 삼월이나 되어야 마칠 것을
힘을 합해 일찌감치 공사를 마치니
기와지붕이 비늘처럼 새롭구나.
앞으로는 백성들이 편안히 농사만 지을 것이니
백성들은 왜 굳이 공사를 벌인 이유를 체감하리라.'
이와 같은 김종직의 적극적인 민생대책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노동력을 제공하는 백성들의 부역의 부담을 크게 줄여, 함양의 거주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경상도 관찰사도 탄복하여 김종직의 선정을 칭찬하는 장계(狀啓)를 조정에 올렸다.
"함양군수 김종직이 정치를 잘하여 고을 백성들이 어버이처럼 따르고, 유민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성종은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를 펼쳐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김종직은 백성들이 세금을 낼 때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공정한 조세부담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향리와 지방 토호가 서로 짜고 부정을 저지르고자 하는 욕구를 근원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함양 땅을 한눈에 보면서 세정을 펼칠 수 있는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세정을 담당하는 향리가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뇌물을 받고 수확량을 적게 신고하는 것을 눈감아주면, 부족분은 힘없는 백성들이 더 부담해야 했다.
김종직은 화공(畵工)과 함께 함양의 산과 강을 답사하였다. 지도에 집과 장정의 숫자, 곡식이 생산되는 전답의 상세한 면적 등의 필요한 기록도 화공에게 추가하여 그리게 하였다.
그는 지도가 완성되자, 동헌에 지도를 걸어 놓고 업무를 보았다.
김종직은 고을의 지도에 세세하게 드러난 농지의 규모를 통해 토호나 향리의 결탁과 속임을 막고, 백성에게 세금을 공정하게 거두는 지표로 삼았다. 공정한 징세는 백성들이 세부담을 줄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가혹한 세금과 굶주림으로 여러 고을을 떠돌던 많은 유민들이 다시 고향을 찾아 돌아왔다.
김종직은 고을 수령으로서 풍속을 교화하여 인륜과 도덕이 바로잡힌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수령칠사의 하나인 학교를 일으키고 학문을 권장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향교를 중심으로 유생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며 덕성 함양을 강조하였다. 또한 미신과 무당을 타파하고 고을에서 성황당을 철폐하였다.
김종직은 봄과 가을에 함께 술을 마시는 향음(鄕飮), 함께 활을 쏘는 향사(鄕射)와 같은 고을 잔치와 양로연 등 지역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행사를 개최하였다. 고을 잔치를 벌일 때는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우애가 좋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참여하게 하여 인륜의 질서가 바로 잡힌 고을 풍속을 만들어 나가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향음과 향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품행이 온 고을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풍속을 교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김종직이 시간을 내어 함양의 유생들을 가르치자, 소문을 듣고 선비들이 멀리서도 와서 들었다. 김종직은 명성을 듣고 각지에서 찾아오는 선비들을 흔쾌히 제자로 받아들여 인재로 키워나갔다. 성균관과 향교에 공자와 공자의 제자들과 함께 조선의 큰 선비로 문묘(文廟)에 모신 정여창, 김굉필도 이때 함양에서 김종직에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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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