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제문처럼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글이 있을까
조의제문처럼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글이 있을까
글이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켜 화(禍)를 입는 일을 필화(筆禍)라고 한다. 조선시대 필화사건이라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처럼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글이 있을까. 김종직은 자신이 쓴 글로 본인은 물론, 자신이 배출한 수많은 제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이보다 더 큰 필화가 있을까.
조(弔) 의제문(義帝文)은 말 그대로 중국 초나라의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글이다. 그런데 왜 조의제문이 조선 최대의 필화사건이 되었을까?
그것은 김종직이 초나라의 의제와 항우를 빗대어 단종을 애도하고 세조를 비난한 글이기 때문이었다.
조의제문을 쓴다는 것은 현재의 국왕을 신랄하게 공격하는 글이기에 역모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김종직도 조의제문의 위험성을 감지했었다. 그랬기에 중국의 역사와 은유로 가득 채워 그 진의를 알아볼 수 없게 글을 지었다.
하지만 훗날 유자광은 조의제문이 깊이 감추어둔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내어 연산군에게 알렸다.
1498년 연산 4년 7월 15일, 실록은 유자광이 김종직의 문집을 구해 그 안에 있는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한 내용을 임금에게 바치며 아뢰었다고 기록하였다.
"김종직이 감히 이러한 부도(不道) 한 말을 했으니, 청컨대 법에 의하여 죄를 다스리시옵소서. 또한 이 글은 세상에 퍼뜨릴 수 없으니 문집 및 판본을 다 불태워버리고 간행한 사람까지 아울러 죄를 다스리시기를 청하옵니다.”
연산군은 유자광이 해설한 조의제문을 읽고 분노했다. 증조부인 세조를 비난한 대역 무도한 글이 아닌가.
연산 4년 7월 17일의 실록에 의하면 연산군이 조의제문을 보고 얼마나 분노했는지 보여준다.
“......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칭찬하며 덧붙이기를 충분(忠憤, 충성스러운 분노)으로 지었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태로운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난(亂)을 꾀해 화(禍)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나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앰으로써 종묘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들과 성덕(聖德)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속여서 적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속으로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연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라고 명하고, 사초에 조의제문을 올린 김일손과 권경유는 물론 수많은 김종직의 제자들을 귀양을 보내거나 처형하였다.
부관참시는 관을 쪼개어 시체를 벤다는 뜻으로, 이미 죽은 사람이 생전에 사형에 해당하는 죄상을 저지른 것이 드러난 경우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시체에 극형을 내리는 걸 말한다.
김종직은 언제, 왜 그토록 위험한 글인 조의제문을 썼을까? 그리고 조의제문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1453년 단종 1년 10월.
당시 성균관 유생이었던 김종직은 엄청난 소식을 들었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무뢰배들과 함께 좌의정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정승을 철퇴로 쓰러뜨렸다고 하고, 영의정 황보인 등 여러 대신을 궁궐로 불러 궁문 앞에서 살해하였다고 했다. 수양대군은 동생인 안평대군을 모반을 했다는 죄로 처단하고, 병권을 독차지하며 정권을 잡았다.
수양대군이 세종 때의 원로대신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자, 한성의 분위기가 극도로 살벌하게 변했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는 고향 근처인 경산 향교의 교수에 자원하여 자리를 옮겼고, 김종직도 어지러운 한양을 떠나 부친을 따라 경산으로 내려갔다.
이듬해 경산에서 김종직은 또 한 번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단종의 왕위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인 한명회와 권람 등에게 살아있는 왕이 왕위를 물려주는 선위(禪位)를 강요받아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고 했다.
김숙자는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내치고 왕으로 즉위하였다는 소식에 곧바로 경산 향교의 교수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스승들인 길재와 정몽주가 보여준 절의를 본받아한 결정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김종직 초상화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