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가 말하기를, 일을 시작하는 것은 쉬우나 이룬 것을 지키기는 어렵다고 하였소. 경은 창업이 어렵다고 생각하시오? 수성이 어렵다고 생각하시오?”
현석규가 왕의 의중을 몰라 답을 머뭇거리자 임금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조께서는 생전에 ‘나는 창업한 임금이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들었어요.”
“세조께서 왕업을 다시 찾은 공로는 창업(創業)과 맞먹고, 또한 중흥을 이룩한 국왕인 까닭으로, 승하하신 후에 묘호(廟號)를 종(宗)이라 하지 않고 조(祖)라고 하였습니다.”
현석규는 임금의 어두운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당의 태종도 전하가 하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때 위징이 말하기를, 창업이 어려운 일이나, 임금이 부지런하지 않으면 이룬 것을 쉽게 잃는다고 했으니 그만큼 수성(守成)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종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조께서 일찍이 세자인 예종에게 이르기를,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은 같지 아니하다. 내가 한 일은 왕권을 수복하기 위해 창업과 다름이 없는 일을 한 까닭으로 재주만 있으면 흠이 있는 사람도, 탐오한 사람도 썼으나, 수성(守成)의 시기를 맞아서는 창업할 때와 같이 할 수 없다.’고 하시며 ‘너는 세종대왕의 수성과 같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고 들었소.”
임금은 말을 멈추고 한참 시선을 허공에 던진 채 있다가, 이윽고 가는 한숨을 뱉어내고 말했다.
“이조에게 명하여 상당군의 관작을 되돌려주게 하시오.”
임금은 이어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과인에게 맡겨진 소명은 세조께서 선왕에게 부탁한 수성을 잘하는 것이오. 세종의 수성과 같이 어진 정치를 뿌리내리고, 선대왕 시절부터 해오던 일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 내 역할이오. 대왕대비가 정사에서 손을 떼었으니, 과인은 앞으로 생각과 몸을 더욱 부지런히 하여 수성에 힘쓸까 하오.”
현석규는 친정체제를 맞은 임금의 고민과 다짐에 몸을 깊이 숙였다.
한명회는 정 1품의 관작을 돌려받고, 다시 조회에도 나오고 원상으로 국정에 참여하였다. 조정의 젊은 관리들은 한명회의 재등장에 대해 심기가 불편하였다.
“상당군이 정희대비에게 부탁을 하여 자리를 되찾았다는 소문이에요.”
“늙어서도 자리에 연연하고 권력에 집착하니, 추하게 보일 따름이네.”
“전하가 충분히 홀로 정사를 결정할 수 있는데 한명회가 부도(不道)한 말로 억지로 정희대비를 말린 것은 수렴청정과 원상제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마음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조정의 신진 관리들이 보기에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대신들은 그들을 따르는 자는 천거하고,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능력 있는 관료의 등용을 막고 있었다. 더구나 임금의 주요 결정을 돕는 원상에다가 권세 있는 주요 관직을 겸직하여 조정에서 잘못된 인사나 불법적인 재물 취득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모두 그들이 원인이었다.
사헌부 관리들이 모여서 원상제의 폐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원상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면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제 친정체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전하께서 이미 장성하셨고 학문이 고명(高明)하시어, 정사를 돌봄에 있어서 홀로 밝게 결단하시니, 어찌 원상들에게 의존해야 하겠습니까?”
“원상을 폐지해도, 만약 큰일이 있을 때에는 정승들을 빈청에 불러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한 뒤에 성상께서 결단하여 시행하면 됩니다.”
사헌부 관리들은 상소를 올려 원상제 폐지를 건의하였다.
“원상 제도는 일시적으로 시행해야지, 영구히 지속할 제도는 아닙니다. 원상들도 교대로 등청하느라 피로함이 없지 않을 것이니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도 아닙니다. 대왕대비께서 정무를 돌려주셨으니, 원상제를 폐지하는 것은 지금이 적합한 때입니다.”
성종은 사헌부가 적절한 상소를 올렸다고 생각했다. 도승지를 불러 상소를 원상들에게 보이고, 이 문제를 의논하게 명하였다.
원상들은 도승지가 보여준 상소를 읽고 아무도 선뜻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명회가 마른기침으로 목을 틔운 뒤, 입을 열었다.
“이제 더 이상 원상제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오.”
정창손도 한명회의 의견에 동조했다.
"주상께서 사헌부가 제기한 원상제 폐지를 왜 우리 보고 의논하게 했겠습니까? 주상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어요. 단지 모양을 좋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원상을 없애자는 의견이 많으나, 중요한 일이 있을 경우 여러 재상을 불러서 의논하려면 지체될 수 있으니 어찌 없애겠소.”
원상들은 임금이 단지 예의를 갖추는 것임을 알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신(臣)들은 모두 이제 원상제를 없앨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들이 비록 승정원에 대기하고 있어도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성종은 원상들을 내려다보며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인도 실은 승정원에 대신을 머무르게 하는 것은 대신을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라 여겼소. 경들의 청을 받아들여 지금부터 원상을 없애겠소.”
성종 7년 5월 19일, 임금은 즉위 7년 동안 지속되었던 원상제를 비로소 폐지할 수 있었다. 성종은 훈구대신들의 반발 없이 원상제 폐지를 이끌어낸 것은 유자광이 원상의 수장인 한명회를 공격한 공이 크다고 생각했다.
유자광은 한명회를 탄핵한 것으로 인해 파직이 되어, 조회에도 참여할 수 없고 임금에게 나아갈 수도 없어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헌부가 원상제 폐지를 건의하여 결국 허락을 얻어내어 조정의 칭송을 받는 것도 못마땅했다. 그동안 대간들의 행태를 보면 권세가의 눈치나 보고 적당히 말하다가 슬그머니 그치는 기개도 없이 녹봉만 축내는 집단이었다. 유자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간들은 결국 다 익은 홍시를 따놓고는 자신들의 공이라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조정의 대신들은 서로 돌아가며 잔치를 열고 사치를 뽐내며 부패와 안일에 빠져있었다. 유자광은 가슴팍을 치며 홀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