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創業) 보다 수성(守成)이 어렵다 (10)

대간의 언론은 군주의 힘이지, 대간의 힘이 아닙니다

by 두류산

10장


김종직은 궁궐 안에 위치한 승문원에 등청하면서 자주 훈구대신들과 마주쳤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정승과 판서는 모두 훈구대신들이 그대로 차지하고 있었다. 훈구대신들은 주요 직책을 돌아가면서 차지하며 삼대 째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김종직은 그들과 조정에서 마주치며 벼슬을 하는 것이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하지가 않았다. 어진 정치를 하려는 어린 임금이 성인이 되자, 기대와 희망을 가졌다. 친정체제에 들어선 젊은 임금은 귀를 열고 의견을 경청하였다. 임금은 제도의 문제점을 이해하는 듯 보였지만 과감히 고치고 개혁하여 바로잡기에는 아직 훈구대신들의 힘이 강했다. 김종직은 훈구대신의 우두머리인 한명회가 파직되는 것을 보면서, 곧이어 훈구대신들이 대거 물갈이가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한명회는 곧 복직되어 등청하였고, 궁궐에서 한명회 주변에 훈구대신들이 모여서 희희낙락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조만간 조정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내려놓았다.

김종직은 조정에서 마주치는 제자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관복을 입고 의젓하게 인사하는 제자들을 대하면 가르친 보람과 함께 장차 미래의 조정에 대한 기대감이 밀려왔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도를 아는 저들이 대간이 되고 대신이 되면, 조정의 기운도 점차 맑게 변할 것이야.’


성종이 승지들과 함께 충의와 절의에 대해 논했다. 도승지 현석규가 임금에게 정몽주와 길재에 대해 말했다.

“고려 말기에 정몽주는 태조의 추천으로 지위가 정승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한 번 마음만 바꾼다면 개국공신이 될 것이니, 누가 그의 권세를 앞설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정몽주는 끝내 절개를 지켜, 죽어도 의(義)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정몽주의 제자인 길재도 관직을 버리고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현석규에게 물었다.

“정몽주 학문이 뛰어났다고 들었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문은 누가 이어받았는지 아시오?”

“승문원 김종직의 아비가 길재의 제자였고, 김종직은 아비에게 정몽주의 학문을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임금은 김종직을 불렀다. 성종은 김종직에게 정몽주와 길재에 대해 듣다가 정몽주의 절의에 대해 물었다.

“정몽주는 결국 조선을 따르지 않았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오?”

“정몽주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백이와 숙제의 절의를 이은 역사에 빛나는 충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종대왕께서도 이것을 인정하시어 그를 삼강행실도의 충신으로 올렸습니다.”

조선의 건국을 따르지 않은 정몽주를 지나치게 칭찬하는 김종직을 보고 임금은 문득 엉뚱한 질문을 했다.

“세조 대왕을 따르지 않고 감히 노산군 복위를 주도하며 역모를 일으킨 성삼문은 어떻게 보아야 하오?”


김종직은 순간 숨이 멎는 듯했으나 굳이 평소의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성삼문과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이 지금은 역적으로 말하고 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 하는 절의를 보였으니, 세월이 흐르면 역사는 정몽주처럼 충신으로 기록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종은 김종직의 말에 안색이 변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승지들도 서로 얼굴을 보며 당황해했다. 임사홍이 나서서 아뢰었다.

“지금 종직의 말은 세조대왕으로부터 전하께 내려오는 거룩한 대통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국문하여 죄를 물으시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임사홍의 말에 어전의 분위기가 찬바람이 부는 듯했다. 임금의 낯빛도 창백해졌다. 성종은 차갑고 냉랭한 목소리로 김종직에게 다시 물었다.

“성삼문이 지금은 역적으로 되어있으나, 후세의 역사에는 충신으로 기억될 것이라 했느냐?”

김종직은 임금의 찌르는 듯한 질문을 온몸으로 받으며 입을 열었다.

“정몽주와 성삼문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성종이 목소리를 높여 재차 물었다.

“경은 노산군의 복위를 꾀한 성삼문을 진정 충신으로 생각하는 것이냐?”

“신은 전하에게 절의를 지키는 정몽주와 성삼문이 되고자 합니다.”

성종은 김종직의 말에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곧바로 호탕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승지들도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김종직은 어전을 물러나오면서 관복 아래 속옷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음을 느꼈다.

‘어린 임금을 위해 죽은 성삼문과 박팽년 등의 절의를 평가하여, 역적의 굴레를 벗기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인가.’


김종직은 밤새 뒤척였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하기 전에 태종에게 읊은 시가 떠올랐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성삼문이 형장에서 참형을 당하기 전에 지었다는 시도 떠올랐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어둠 속에서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길재 선생이 임금에게 아뢰었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신을 놓아 보내 고향에 돌아가게 하여, 효도로 늙은 어미를 봉양하게 하여 남은 생을 마치게 하소서.’

김종직은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벼루와 종이를 찾았다. 김종직은 붓을 들어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고향의 어머니가 거의 팔순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가까이서 봉양하고자 하오니 사직을 허락해 주소서.”


성종은 학문이 깊고 문장이 좋은 김종직을 놓치기가 싫었지만 효도를 하겠다고 사직을 청하니 말릴 도리가 없었다. 성종은 김종직의 고향 가까운 곳의 고을 수령 자리를 찾아보라고 이조에 명하였다.

김종직은 임금의 배려로 선산의 부사로 임명되었다. 선산은 부친과 길재선생의 고향이었다. 김종직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고을의 수령으로 가게 된 것을 기뻐하며, 하루빨리 도성을 떠날 수 있도록 짐을 꾸렸다.


1476년 성종 7년 7월, 김종직은 선산부사 부임 인사차 임금을 알현했다. 임금은 목민관이 되어 떠나는 김종직을 아쉬워했다.

“정승들이 인재를 외방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말렸다. 하지만 어찌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겠다는 도리를 막을 수 있겠는가?”

“연로한 모친에게 마지막 효도를 할 수 있게 허락하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종은 김종직이 경연에서 해 준 말이 생각나 물었다.

“역사에 기록된 성군들은 어떻게 뛰어난 임금이 될 수가 있었는지를 경은 자주 말해주었다. 이제 지방의 수령이 되면 오랫동안 조정을 비울 것이니, 과인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시오.”

김종직은 그동안 생각했던 바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아뢰었다.

“나무가 먹줄을 따라 자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이 간언(諫言)을 따라 정사를 베풀면 성군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총명하고 지혜로운 임금은 대간을 키우고 강개한 말을 좋게 여기며 간언을 받아들이기를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김종직은 조정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훈구대신을 견제하려면 그들을 겁내지 않는 곧고 의로운 대간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간은 군주의 눈과 귀이니, 정치가 어디가 잘되고 어디가 잘못된 지, 백성이 기뻐하는 일과 원통해하는 일은 무엇인지, 군주가 대간들이 아니면 어디서 듣겠습니까? 세종께서 새로 임명된 대간에게 강조하신 말은 대간이 대신의 눈치를 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조 때를 거치면서 대간들의 기개가 약해졌고, 적당히 말하는 시늉이나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하께서는 실로 권세 있는 대신을 겁내지 않는 기개 있는 대간을 키워야 합니다.”


성종은 귀가 번쩍 틔었다. 대왕대비의 섭정을 끝내어 친정체제가 되고 원상제도 폐지되었지만 조정에 훈구대신들의 힘은 여전히 막강함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여러 의견을 들어서 임금이 이미 결정한 일들도 대간들이 집요하게 청을 하였던 일들이 생각났다.

“대간들이 대신들을 탄핵하면서 지나친 말로 군주의 손발을 움직일 수도 없을 지경으로 모는 경우도 있소.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간의 언론은 곧 군주의 힘이지, 대간의 힘이 아닙니다. 대간의 언론 기능을 장려하여 대간이 활발하게 임금의 이목이 되어 아뢰면, 반드시 대신들의 부정과 부패가 줄어들고 대신들의 탐오하고 비난을 받을 행동은 움츠려들 것입니다.”


김종직은 말을 이었다.

“세종이 재상의 눈치를 보지 말라고 한 말씀에 한 대간이 답하기를 ‘신은 재상의 눈치를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하의 눈치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했습니다. 세종께서는 이 말을 듣고 ‘장하도다. 대간이 모두 이와 같이만 한다면 나라가 바로 서지 않을 수가 없도다.’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강개한 대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알겠소.”


성종은 김종직과 이야기를 나누니, 그를 떠나보내는 것이 새삼 아쉬웠다. 임금은 김종직이 함양에서 좋은 정치를 펼친 것을 잘 알기에 선산에서도 어진 수령이 될 것으로 믿었다. 임금은 당부의 말로 김종직을 격려하였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고, 백성을 보살피고 살리는 일은 하늘의 명령이니, 과인을 대신하여 백성을 잘 살펴주시오.”

“성상(聖上)의 말씀을 명심하여 덕을 근본으로 고을을 다스려, 선산 고을의 온 백성을 공정하고 치우침이 없이 고루 살피겠사옵니다.”


김종직은 함양에서 조정의 중앙 관직으로 복귀한 후, 자청하여 다시 한양을 벗어났다. 도성에 올라온 지 6개월 만이었다.


(다음 권에 계속.....)




'선비의 나라' 연재는 브런치 매거진 (https://brunch.co.kr/magazine/hwan3 ) 에 올려 공유하고 있습니다.



(창업수성 글 출처)

http://www.hanj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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