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가 사초를 고친 것으로 보이니, 청컨대 국문하게 하소서
민수는 자신이 작성한 사초를 받아 들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민수는 문제가 될 만한 곳을 서둘러 찾았다. 민수는 우선 실록청 당상관인 한명회에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았다.
‘이시애는 난을 일으키면서 한명회와 신숙주가 반역을 도모했다고 말했다’고 써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민수는 두 정승들이 이 구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불안했다.
‘한명회와 신숙주가 실제로 임금을 배반하고 반역을 도모한 것이 아니었는데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뜻의 ‘불궤(不軌)’라는 말을 쓰기는 부담스럽지 않은가.’
민수는 아예 불궤(不軌)라는 표현을 지워버리며 중얼거렸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지금 최고의 권세가인데,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야.”
사초를 넘겨 실록청 당상관인 양성지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았다.
‘부유한 상인 여러 명이 재화를 다투다가 송사가 일어나자 임금은 사헌부에게 이를 조사하게 하였고, 이후 진행사항을 물었다. 사헌부 집의 등이 대답을 분명히 하지 못하므로 사헌부 관리 전원을 하옥시켰는데, 대사헌 양성지는 홀로 구차하게 용서를 구하여 그대로 자리를 유지하였다.’라고 써져 있었다.
"양성지가 구차하게 용서를 구했다고? 사관일 때 젊은 나는 패기가 넘쳤고 춘추필법으로 거침이 없었군.”
민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구차하게 용서를 구했다는 표현인 ‘구용(苟容)’을 삭제하였다.
훈구대신인 홍윤성에 대해서는 ‘정난공신 홍윤성이 처녀를 간통했다고 그 집안사람이 고소하므로, 홍윤성을 하옥하여 조사하였는데, 고소한 사람은 무고죄를 얻었고, 나중에 그 처녀를 홍윤성이 데리고 살았다’는 글이 보였다. 민수는 자신이 쓴 이 기록을 보고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홍윤성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민수는 이 기록을 아예 통째로 지워버렸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사초를 계속 살피니 훈구대신 김국광에 대한 기록이 보였다.
"성품이 절개가 없고 탐욕이 많았다고? 대단한 직필이나 단정적인 표현이야. 그 시절에는 무서운 것이 아예 없었던 게야.”
민수는 김국광에 대한 평가를 자신의 주관적인 표현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인양 고쳐 썼다.
“김국광은 오래도록 권좌에 있어 비방이 많았다.”
그리고 윤사흔이 술에 취해서 용렬한 말을 했다는 기록과, 임원준이 의술로써 관직을 얻었다는 기록도 마음에 걸려, 수정하여 고쳐 썼다.
이로써 민수는 자신이 제출한 사초에서 한명회와 신숙주, 양성지, 홍윤성, 김국광, 임원준 등 일곱 명의 실록청 당상들과 관련된 기록을 고쳤다.
민수는 고친 사초를 은밀히 강치성에게 다시 건넸다.
실록청 관리들이 제출된 사초들을 살펴보다가 민수의 사초에 여러 군데 부자연스럽게 고친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사실이 실록청의 당상들에게 보고되었고, 한명회와 실록청 당상들은 이러한 사실을 곧장 임금에게 아뢰었다.
"나라의 역사는 만세(萬世)의 공론입니다. 민수가 사초를 건드려 나중에 고친 것으로 보이니, 청컨대 국문하게 하소서.”
"사초를 건드리다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예종은 의금부에 명하여 민수를 당장 잡아들이라고 하였다.
의금부가 민수의 집에 들이닥치자, 민수는 지은 죄가 두려워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아내가 말려 멈추었다. 의금부 나졸들은 집을 샅샅이 수색하여 종이를 태우다 남은 재 등 사초를 고치면서 남긴 흔적을 수집하고, 민수를 포박하여 궁궐로 압송하였다.
임금이 끌려온 민수를 친히 심문하였다.
"네가 사초를 고치고 삭제하였느냐?”
민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자복하였다. 임금이 민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서 사초를 고쳤느냐?”
민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신(臣)이 강치성에게 청하여 사초를 빼내었습니다.”
임금은 부모의 병 때문에 휴가를 내고 고향에 급히 내려갔다는 강치성을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오도록 하였다.
임금이 다시 민수에게 물었다.
"네가 고치고 삭제한 것은 어떤 기록이었더냐?”
"신이 사관으로 있을 때 전해 들은 일을 썼던 것입니다. 사초를 바칠 기한이 촉박하여 미처 수정하지 못하고 제출하였는데, 생각해 보니 사(史)라는 것은 만세(萬世)에 전해지는 글인데 전해 들은 일을 망령되이 기록함은 옳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고치고 지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전해 들은 일을 썼느냐? 선왕의 일도 또한 전해 듣고 쓴 것이냐?”
민수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임금에게 변명하며 아뢰었다.
"신이 고쳐 쓴 것은 선왕의 일이 아니라 대신들의 일입니다.”
예종이 목소리를 높이며 다그쳤다.
"네가 고치고 지운 데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전부 말해 보아라!”
"한명회와 여러 대신들이 지금 실록청에 당상관으로 있어 신이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서 고쳤습니다.”
임금이 노하여 민수에게 소리쳤다.
"대신들의 일을 썼다가 다시 삭제하였으니, 네가 대신들에게 아부하려는 것이다!”
민수는 임금의 노기에 몸을 떨었다.
"신(臣)은 단지 대신에게 원망을 살까 두려웠을 뿐이지, 실제로 아부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임금은 민수의 대답에 화를 내며, 어느 대신들을 무서워하는지 장(杖)을 때려 알아내도록 명하였다. 민수는 매를 맞으며 두려워하는 대신들을 떠오르는 대로 말하니, 거의 20여 명에 이르렀다.
민수가 대신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하며 거론한 20여 명의 인물 가운데 유자광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수가 언급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세조의 즉위를 도운 훈구대신이었으나 유자광이 포함된 것은 유자광이 예종 대에 들어와 남이의 역모를 막은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고 임금과 가까워져 급속히 권신(權臣)으로 부상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신음하는 민수를 보니, 임금은 세자 시절에 사제지간이었던 정이 생각났다. 예종은 장(杖)을 그치게 하고 결박도 풀어주게 하였다. 민수는 임금에게 애걸하였다.
"전하, 신은 집안의 외아들이니 목숨이나 보존하여 가문이 저로 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소서!”
한명회는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쓰게 하는 것에 극력 반대한 원숙강이 떠올랐다. 한명회는 임금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원숙강이 전 날에 사초에 이름을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하였는데 이번 일과 연관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심문하게 하소서.”
임금은 실록청에 명하여 원숙강이 작성한 사초를 세세히 살피게 하였다.
실록청 관리들은 원숙강이 제출한 사초에 지워서 고친 곳이 있음을 찾아내었다. 훈구대신 권람의 졸기(卒記)를 기록하면서 ‘권람이 큰 저택을 지었다.’와 그 아래에 ‘임금이 부처(佛)를 좋아하였다.’고 썼는데, ‘큰 저택을 지었다’는 기록을 삭제한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졸기는 당대의 중요한 인물이 세상을 떠나면 사관이 죽은 자에 대한 자신이나 세간의 평가를 담은 기록을 말했다.
실록청 대신들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원숙강이 사초에 쓴 권람의 기록 중에 허물이 되는 부분을 삭제한 것을 찾아내었습니다.”
한명회는 원숙강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원숙강이 권람이 졸(卒)하였다는 기록 밑에 임금에 관한 말을 함께 써넣은 것은 매우 옳지 못합니다.”
예종은 원숙강을 친히 국문하였다.
"너는 임금의 허물에 관한 기록은 남기고 재상의 허물은 삭제하였으니,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냐?”
"대신을 거스르면 그 화(禍)가 빠르게 미치기 때문에, 신이 삭제하였습니다.”
임금이 분노하며 말하였다.
"너는 대신에게는 아부하고, 임금은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신이 어찌 그리 하겠습니까?”
"너는 선왕의 허물을 적은 것은 남기고, 대신의 허물만을 지웠다. 네가 재상에게는 아부하고 나를 어린 임금이라고 얕보고 임금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원숙강은 임금이 소리를 지르며 꾸짖는 말에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임금은 의금부에 지시하여 원숙강을 ‘임금보다 대신들을 더 무서워했다’는 죄목으로 참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원숙강의 할아버지 원호(元昊)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살아서 절개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다. 원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나 단종이 수양 대군에 의해 폐위되어 영월로 쫓겨 가자 분개하여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원호는 손자가 벼슬길에 올라 사화(史禍)로 참형을 당하자 손자의 글과 자신이 쓴 책을 꺼내어 모두 소각하였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학문을 닦더라도 입신양명(立身揚名,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침)은 탐하지 말라고 유언으로 남겼다.
예종은 의금부에 지시하여 사초를 민수에게 내어준 강치성을 참형에 처하도록 명했다. 처음 사초를 빼내어달라고 청탁을 받았던 이인석은 사실을 알면서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곤장 1백대를 때린 후, 고향에서 군역을 치르게 하였다.
왕은 민수를 불쌍히 여겨 참형은 면하게 해 주었다.
"과인이 세자 시절부터 민수를 봐서, 그의 사람됨을 잘 안다. 민수는 장(杖) 1백 대를 때려서 제주의 관노에 배속시켜라.”
민수의 옥(獄)은 조선 최초로 사초가 문제가 되면서 발생한 사화(史禍)였다. 실록청에 합류하여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있던 김종직은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민수와 강치성이 참변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만감이 교차하였다.
김종직은 참형을 당한 강치성과 관노가 되어 제주로 떠난 민수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민수는 촉망받는 나라의 인재였다. 김종직과 민수는 나라의 인재를 선발하여 독서와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사가독서(賜暇讀書)도 같이하고, 임금과 대신들 앞에서 함께 경전을 강의하기도 한 각별한 사이였다. 순간의 잘못 생각으로 자신과 동료에게 엄청난 화를 불러오게 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사(史)라는 글자는 만들 때부터 손(手)으로써 중심(中)을 잡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사실대로 쓰지 않고 가필이나 곡필을 하면 어찌 사관이 역사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겠나.’
홍귀달이 김종직을 찾아 민수의 일을 아쉬워하며 말했다.
"사관이 되어 춘추필법으로 준엄하게 직필을 해야 하는데, 대신들의 보복이 두려워 삭제하고 수정을 한다? 역사와 후세 사람들의 평가는 두렵지 않다는 것인가?”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에 임명되면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직필(直筆)을 생명으로 여기다가, 벼슬을 하는 연차가 쌓일수록 기개가 꺾이고 대신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안타깝지만 현실이 되었네.”
사관(史官)은 국왕과 신하가 국정을 논의하고 면대하는 모든 곳에 참여하므로 관리들이 선망하는 직책이었다. 사관 직에 결원이 생기면 4조(四祖: 증조·조·부·외조)에 흠이 없는 가문에,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문과 급제자를 3배 수로 뽑아 한 사람을 엄선하여 임명하여 사관이 된 자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홍귀달이 탄식하며 말했다.
"훗날 문제가 될 것 같다고 쓴 것을 지우거나 아예 쓰지도 않는다면, 임금이나 대신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날에는 날씨 외에 사관이 기록할 것이 어디 있겠소?”
김종직은 민수를 변명하였다.
"애초에 사초에 이름을 쓰고 제출하라는 명이 잘못되었네. 민수가 춘추필법으로 사초를 기록했지만, 실록청에서 대신들이 자신들의 기록을 볼 터이니, 어찌 겁을 먹지 않을 수가 있겠소?”
김종직은 훈구대신들이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제대로 견제할 세력이 없음이 아쉬웠다.
‘사관들도 역사가 내리는 평가보다 인사권을 가진 대신들의 평가를 더 살펴야 하는 현실이 되지 않았는가.’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