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1
청년 오경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인간관계를 통해 그의 성품을 살펴보겠습니다.
역과에 합격한 청년 오경석은 18세에 같은 통역관 집안의 21세 여성과 결혼합니다. 둘의 금실은 좋았다고 하는데 아내가 전염병에 걸려 소생 없이 결혼 5년 만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3년 후에 재혼을 합니다.1)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 남성이 아내가 죽은 후 3년 내 재혼하는 경우가 70% 이상, 2년 내 재혼하는 경우가 50% 이상이라고 합니다.2)
오경석의 당시 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청년 시절 사이좋은 아내를 사별한 일은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분제도가 존재하던 시대에 결혼이라는 ‘의무’를 바로 이행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에 대한 정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오경석은 아내가 떠난 그해, 23세의 나이로 처음 베이징에 사신으로 파견됩니다. 그런데 귀국 직후, 다시 한 번 소중한 사람을 잃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절친한 선배였습니다.
오경석은 선배 잃은 비통한 심정을 잊을 수 없어 20년이 지난 후에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남길 정도로 선배를 끔찍이 아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이들(고문서와 금석문)을 얻음에 모두 수십 년의 오랜 시간이 걸렸고 천만리 밖의 것이라 마음과 정신을 대비치 않고서는 가히 쉽게 얻을 수 없었다. 나와 함께 이러한 취미를 가진 선배가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서 수장한 것들을 미처 보지 못하였다. 저승의 선배를 깨워 같이 토론하면서 감상할 수 없을까. 이 제문을 쓰면서 더욱 눈물을 금치 못하겠다.3)
수십 년의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얻은 고문서를 보면서 30세에 요절한 선배를 잊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던 사람이 오경석이었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진실한 마음은 중국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그는 중국 문인들 수십 명과 폭넓은 교우관계를 맺으며 교류했는데, 중국에 파견된 사신들이 모두 중국인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상황을 한 번 가정해 볼까요?
여러분은 국가 대표로서 사람을 만나고 있으며, 상대국은 우리보다 외교적으로 우위에 있는 국가입니다. 상대방은 여러분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할 텐데, 그중에는 정치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역시 그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언행을 조심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처음 한두 번은 여러분에게 호기심으로, 또는 의례상으로 친절을 베풀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인품은 드러나기 마련이므로 여러분의 행동이 진심인지, 이익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있게 되고, 상대방은 그에 따라 더 친절하게, 또는 사무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치적 이익이 계산되는 상황에서 그런 의심의 눈초리를 극복하고 상대방의 진심을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을 방문한 모든 사신이 폭넓은 교우관계를 맺은 것은 아닙니다. 개화사상의 또 다른 중심인물인 박규수도 중국을 방문하지만, 박규수는 중국 사상가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습니다.4)
오경석이 박규수보다 중국을 훨씬 많이 방문하긴 했지만, 단순히 중국 방문 횟수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경석은 중국 사상가들의 연구 분야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그들과 함께 연구했고, 학문적인 도움뿐 아니라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자료를 어렵게 구하여 선물하기까지 했습니다.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이런 노력은 ‘마음’이 통해야 가능한 것들입니다.
또 오경석은 그들의 경제적 필요를 파악하고 그들이 조선 인삼 상인과 직접 직거래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인삼은 조선의 고가 수출품이었는데, 당시 청에 인삼국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파는 인삼의 품질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조선의 인삼을 직접 구매하기를 원했고, 중국인들은 그를 신뢰했기 때문에 매번 그를 통해 조선의 인삼을 구입하게 됩니다.
이렇게 중국인들은 경제적인 문제까지도 청년 오경석을 깊이 신뢰했는데,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는 청년 오경석의 성품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인맥을 구축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거의 60명에 달하는 중국인 인사들과 교류하게 됩니다.5)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런 오경석의 인품 덕분에 병인양요를 겪을 당시, 중국 문인들은 오경석에게 중요한 정보와 외교적 대책을 아낌없이 제안해주었고, 그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조선은 프랑스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수백 통에 달하는 편지로 중국 문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청년의 진정성 있는 성품이야말로 지금의 청년들에게 필요한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개인’을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개인의 능력과 개성이 주목받고, 그러한 것이 상품화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끕니다. 상대방의 의견보다는 ‘나의 의견’이 먼저 중요하고, 다수를 위해 누군가가 불편함을 겪어야 할 상황이 될 때는 ‘굳이 내가?’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인’이 강조되는 지금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이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우리 각자는 청년 오경석과 같이 ‘성심성의껏 나의 생각을 공감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기를 희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청년 오경석이 사람을 대하는 진심은, 나라를 구하는 상황에서도 반복됩니다. 그의 성품은 조선을 변화로 이끄는 원동력이었고,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닌, 분명 ‘누군가’를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15-116쪽
2) 박희진, 「조선시대 양반의 혼인연령과 재혼금지가 출산에 미치는 영향-문집, 족보를 중심으로-」, 낙성대경제연구소, 2007, 169쪽
3)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27쪽
4)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67쪽
5) 이문호, 『오경석의 한중 교류 연구 -『중사간독첩』을 중심으로』, 한성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4, 148-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