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오경석, #012 19세기 조선의 상황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1

by 연결고리

시대 읽기


#012 19세기 조선의 상황 – 오페르트도굴사건, 제너럴셔먼호사건, 신미양요


병인양요 이후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지배층은 자신들의 잘못된 판단을 반성하고 보완했을까요?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서양에 대한 배외 감정도 그만큼 깊어집니다.



이런 상황에 기름 붓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병인양요 2년 후에 일어난 오페르트 도굴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독일인 오페르트가 조선과의 통상을 압박하기 위해 프랑스 신부, 미국인 통역관, 조선인 안내자와 유럽·필리핀·중국 선원 등 총 140명으로 이루어진 도굴단을 이용하여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묘의 단단한 구조 때문에 실패로 끝납니다. 하지만 오페르트는 조상의 시체를 도굴한 행위로도 부족하여 남연군의 시체를 빼앗았다는 뻔뻔한 거짓말을 하며 통상 요구에 응하라는 협박문을 조선에 보냅니다. 그리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무력으로 위협까지 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흥선대원군을 격분하게 만들었고, 오랑캐라는 서양의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켰습니다.1)



한편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두 달 전, 대동강에서는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식량을 약탈하고 백성을 살해하다가 조선의 군민에게 침몰당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당시 평양 군민이 식량을 제공하는 인도적 대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너럴셔먼호가 해적처럼 무력을 행사하자 박규수가 이 배를 소각시킨 것입니다.



제너럴셔먼호 소식이 선교사를 통해 청에 전해지자 미국·영국·프랑스는 조선에 대해 삼국 공동원정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단독으로 일으키자 삼국 공동원정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고 미국 역시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원정 계획을 추진하게 됩니다.



만약 조선에 대해 미·영·프 삼국의 원정이 실현되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확실한 것은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처음부터 무력을 내세워 약소국을 침략할 태도를 갖고 있었고, 조선은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원정 계획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다가 1871년 실행됩니다. 미국은 이미 1858년 포함외교(해군 함대로 무력 압박을 가하는 외교방식)로 일본을 개항시켰기 때문에 일본 나가사키에 조선 침략을 위한 함대를 집결시킵니다.



당시 미군은 조선의 허가 없이 강화해협을 침입·탐색하다가 조선 포대의 선제공격을 받게 되는데, 미군은 이를 빌미로 조선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 방식은 훗날 일본이 운요호사건을 일으킨 후 강화도조약 체결을 강요하는 상황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정부는 미군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미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조선의 진지는 처참하게 파괴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통상 수교 거부 의지도 꺾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미군은 결국 오래 머물지 못하고 철수하게 됩니다.2)



병인양요를 이미 경험했던 조선은 서양의 다음 침략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고, 군사적 대비는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를 경험하고 추진한 군사 대책은 기존의 병서를 참고하거나 『해국도지』 등의 자료를 참고하는 것이었는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해국도지』는 1차 아편전쟁 이후에 저술된 세계지리서로서 병인양요 발발 20여 년 전에 출판된 책이었습니다.3)



이렇게 뒤처진 조선의 안일한 개혁 수준을 고려할 때 신미양요에서 조선의 패배는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오히려 미군의 철수를 패배로 간주하고 전국에 ‘서양 오랑캐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기록된 척화비(斥和碑)를 설치합니다.



조선은 중국이 겪은 아편전쟁, 일본이 겪은 미국의 포함외교, 그리고 프랑스와 미국에 의해 일어난 두 차례의 양요에서 깨달은 것이 없었습니다. 서양의 압도적인 무력을 경험했으면서도 결국은 ‘척화비’로 개혁의 기회를 닫아버리고 긴장을 고조시킨 당시의 상황은 중인 청년 오경석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가정이긴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서양의 만국박람회를 직접 관람했다면,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에서 미군의 포격을 직접 목격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요?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운 서양의 무차별적인 침략과 조선의 무능한 대응. 어느 것이 더 큰 문제일까요? 당연히 전자입니다. 하지만 도덕적인 방법으로 서양의 무차별적인 침략을 막을 수 없어 조선의 피해가 명확하다면 조선의 무능한 대응도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서양의 침략, 조선 지배층의 무능, 그리고 신분적 한계라는 3가지 장애 속에 청년 오경석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던 지배층처럼 행동하지 않았고, 역경에 도전했습니다. 그 청년이 어떤 마음으로 불가능한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이제 그 청년의 삶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청년을 위한 역사


1)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1, 인물사사상사, 2007, 120-121쪽
2) 이상태,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군사』 1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987.7, 171-180쪽
3) 유영익, 「흥선대원군」, 『한국사 시민강좌』13, 일조각, 1993,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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