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오경석, #011 19세기 조선의 상황(3)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1

by 연결고리

시대 읽기


#011 19세기 조선의 상황 – 이양선의 등장, 흥선대원군의 쇄국, 병인양요



서양 선박을 의미하는 이양선(異樣船) 출현에 관한 기사는 17세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 배는 영국의 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우리나라 연안에 나타난 외국선박을 이르는 말로 황당선(荒唐船, 황당한 모양의 배)이라는 말도 사용되었는데, 17세기의 황당선은 서해를 침범하는 청의 어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도 가끔 뉴스에 언급되는 중국의 불법 어선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들 어선은 밀무역이나 불법조업을 했기 때문에 조선의 골칫거리였고, 조선의 해안 방어력이 노출되는 문제 때문에 조선은 황당선의 출몰 문제를 청에 항의하거나 황당선을 나포하여 이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베이징으로 압송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해안 방어 강화를 논의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18세기 말엽을 지나 19세기에 이르면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서양 이양선 출몰이 빈번해지고,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은 조선의 연안을 측량하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이어갑니다.



이들은 이제 경상, 전라, 황해, 함경, 강원 다섯 도의 바다에 나타났고, 통상을 요구하거나 해안을 측량하던 중 조선인과 충돌을 벌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가 동해안을 항해하던 중 독도를 확인하고 리앙쿠르 암초라고 명명하게 된 때도 이 시기입니다.



서양의 출몰 빈도는 잦아지고, 아편전쟁으로 개항한 중국의 소식과 미국의 무력 시위로 개항한 일본의 소식을 모두 들었던 조선이었지만 조선은 서양에 대한 마땅한 방비도 없이 그저 쇄국을 고수했을 뿐입니다.



당시 조선 연안을 탐사한 한 프랑스의 함선이 본국에 보고한 다음의 내용을 보면, 당시 조선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조선은 허약하고, 종주국인 청도 조선을 보호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유럽의 열강들이 마음막 먹는다면 쉽게 점령될 것이다. 러시아는 이런 허점의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을 점령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 선박들이 근래에 조선 해안을 탐사하며 그 준비를 하고 있다. 러시아의 점령을 막는 길은 프랑스가 선수를 치는 데 있다.1)



위기의 신호는 반복되었지만 조선은 변화에 둔감했고, 고종 즉위로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때에도 국내 정치는 개혁하려고 힘썼지만 대외 정책은 여전히 쇄국을 답습했습니다. 그리고 서양의 계획적인 침략은 결국 프랑스의 병인양요, 미국의 신미양요로 실행됩니다.



먼저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병인년에 서양이 일으킨 난리)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2차 아편전쟁 이후 러시아는 두만강 유역의 땅을 차지하면서 조선과 국경을 맞댄 상황이 되자 조선에 집요하게 통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제어)로 대응하려고 했는데, 그 방법은 천주교 신자의 건의를 따라 프랑스를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자신이 불우한 시절에 천주교인과 접촉이 있었고, 고종의 유모와 대원군의 부인·딸 모두 천주교도였을 만큼 흥선대원군 스스로가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 때문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오랑캐일지언정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서양을 활용하겠다는 실리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를 계기로 불어난 천주교 세력들은 종교 허용이라는 큰 기대를 걸게 됩니다.2)



그런데 1866년 1월, 베이징에서 돌아온 사신은 청이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여기에 대신들은 프랑스 주교를 만나고자 했던 대원군을 거세게 반대했고, 대원군의 반대 세력은 대원군이 천주교 등의 불순한 세력과 흥정한다며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국가의 침략’을 위기로 인식했지만, 지배층이 인식한 위기는 서양 사상에 의한 ‘성리학적 신분 질서의 붕괴’였습니다.



지배층에게는 국가의 위기보다 지금 당장 자신들의 신분적 안위가 훨씬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지배층이 기득권을 지키려 들었기 때문에 국가의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 결과 아편전쟁 이후 국권피탈까지 70년에 가까운 시간을 허비하게 된 것입니다.



반대파의 공격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은 대원군은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안타깝게도 대원군은 프랑스를 이용하려는 뜻을 철회하고, 천주교 세력과 흥정한다는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입니다.3)



제국주의 국가가 종교를 침략의 도구로 활용한 예는 많이 있는데, 프랑스가 병인박해를 이유로 병인양요를 일으킨 것도 마찬가지 사례입니다.



프랑스가 프랑스 선교사 순교를 구실로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신도들의 안내를 받아 강화도를 정찰하고 그해 11월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 군대는 종교인 보호가 아니라 순수하게 조선의 보물 약탈에만 집중하여 외규장각 서적, 19만 프랑 상당의 은괴 등을 빼앗아갑니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병인양요 당시 약탈당한 『의궤』의 반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해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으로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며 이곳에 보관되었던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의 행사를 기록한 문서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의궤는 2011년 임대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반환되었는데, ‘임대’라는 굴욕적인 형식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약탈품임에도 불구하고 강대국을 상대로 문화재를 환수하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의궤의 반환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박병선입니다. 그녀는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 프랑스의 냉대 속에서도 의지를 꺾지 않고 의궤 반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그녀는 뛰어난 실력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했는데, 유학을 떠날 당시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의궤를 찾아보라는 지도 교수의 당부를 바탕으로 문서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유학을 떠난 지 20여 년 만인 1975년, 도서관 창고에서 드디어 의궤를 발견합니다.



박병선은 의궤의 존재를 한국에 알리게 되지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비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박병선에게 사표를 강요하여 그녀를 사직시킵니다. 이후 프랑스 도서관은 그녀의 도서관 출입을 금지시키거나 그녀를 한국의 스파이로 부르며 냉대했는데 박병선은 이런 상황에 굴하지 않고 10여 년간 개인 자격으로 도서관을 드나들며 의궤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의궤 반환 운동은 이렇게 불이 붙습니다.4)



이런 상황에서 외규장각 문서 반환은 경부고속철도 건설 사업과 맞물리게 됩니다. 지금의 KTX로 알려진 경부고속철도 사업은 1980년대 말부터 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이 사업권을 따기 위해 당시 일본의 신칸센, 독일의 이체에, 프랑스의 테제베가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기술 수준도 부족했지만,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철도를 건설한 일본에게 다시 고속철도를 건설하게 한다는 것은 국민 정서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와 독일이 경쟁하게 됩니다.



이때 프랑스의 질 나쁜 외교활동이 시작됩니다. 프랑스 대통령은 이 사업을 따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면서 의궤 1권을 반환하였고, 계약이 성사되면 외규장각 문서 모두를 반환할 것처럼 제스처를 취합니다.



그러자 프랑스에 우호적인 국내 여론이 형성되었고, 최종적으로는 김영삼 정부 때 프랑스와 계약이 성사됩니다. 그런데 의궤가 반환될 거라는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프랑스 자국 여론을 빌미로 반환을 거부하였고, 외규장각 문서 반환은 결국 없던 일이 되어 버립니다.



고속철도건설 사업은 17년간 인천 국제공항 1단계 사업비의 2.5배를 초과하는 18조 4,358억의 막대한 공사비가 소요된 계약이기에 우리나라가 전혀 불리할 것이 없음에도 외규장각 문서를 받아내지 못한 당시의 상황은 안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5)



경부고속철도 사업과 연계하여 외규장각 문서를 반환하는 일은 실패했지만, 이후에도 문서 반환 노력은 계속되어 2011년 드디어 의궤 297권이 반환됩니다. 그리고 박병선은 가슴 뭉클한 의궤 반환을 목격하고, 그해 생을 마감합니다.



145년 만에 반환된 의궤였지만 소유권은 프랑스에 있고, ‘5년마다 갱신 가능한 대여’ 조건이 붙었기 때문에 박병선이 “우리의 의무는 남아 있다.”라고 강조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6)



이미 한 세기가 지난 시점에서조차 과거의 불법 약탈에 대해 보상은커녕 완전한 반환을 이뤄내지 못한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국제 문제를 도덕적인 관점에서 해결할 수 없고 ‘힘의 논리’로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은 인간 세계가 이렇게 냉정하고 무섭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역사는 과거의 사건으로 끝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는 강화도 약탈만 자행한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 함대는 한강 입구를 봉쇄하여 물자의 유입을 막았습니다. 그 기간은 불과 33일에 불과하지만 한강을 통한 물자 보급이 막히자 서울엔 큰 소동이 일어나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피난을 갔다는 말이 돌았다고 합니다.7)



역사에서 병인양요는 조선군에 의해 프랑스가 퇴각한 사실을 중요하게 강조하지만, 강화도의 약탈과 서울의 고립 상황을 고려할 때 당시 조선 정부는 서양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청년 오경석이 제공한 정보가 없었더라면 병인양요의 위기는 한층 더 심각했을 것입니다.



청년을 위한 역사


1)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 32, 국사편찬위원회, 2002, 494-500쪽
2)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1, 인물사사상사, 2007, 93-94쪽
3)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1, 인물사사상사, 2007, 94-95쪽
4) 사회팀, 「20년만에 의궤 찾은 박병선 박사의 헌신과 열정(KBS스페셜)」, 뉴스엔미디어, 2013.3.31.「박병선」, 『두산백과』, 네이버지식백과
5) 지식엔진연구소, 「외규장각 문서」,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네이버 지식백과
정훈식, 「[숫자로 보는 경부고속철도] 총공사비 18조4358억 한강교 16개 건설」, 파이낸셜뉴스, 2002.12.31.
6) 이향휘, 「박병선 박사 "의궤, 영구반환은 우리의 몫"」, 매일경제, 2011.6.12.


7)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1, 인물사사상사, 2007, 107쪽
keyword
이전 10화청년 오경석, #010 19세기 조선의 상황(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