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오경석, #009 19세기 조선의 상황(1)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1

by 연결고리

시대 읽기


#009 19세기 조선의 상황 – 성리학적 명분론



그렇다면 당시 조선은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일일이 서양의 발전 상황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조선의 여건은 매우 불리했습니다.



서양이 중국과 일본을 강제 개항시킬 당시 조선은 외국과의 교류를 금지하였고, 바다에서는 지금의 수평선으로 지칭되는 수종(水宗)을 경계로 삼아 이를 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1)



전근대 시기 해외 진출을 막은 동아시아의 상황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조선은 유독 그 상황이 엄격했고, 시대 변화에 둔감했습니다.



바다를 통해 해외로 진출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선박은 조운선과 같이 근해에 물자를 운반하는 용도나 어선으로 활용되었고, 어선 대부분은 9~12m 정도의 크기를 가진 작은 목선이었습니다. 따라서 서양의 군함이나 태평양 횡단 여객선과는 큰 격차가 있었습니다.2)



정보 전달 속도도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전신을 활용하여 정보를 전달하는 시대에 조선에서 가장 빠른 정보 전달 수단은 봉수제도였습니다.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정보를 전달했을 때 국경에서 도성까지 무려 12시간이나 소요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조차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3)



만국박람회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서양에서 전시된 다양한 발명품은 조선에서는 상당히 낯선 것이었습니다.



왕 중심의 전제적 권력과 신분제도는 공고하게 유지되었고,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의회설립이나 의무교육을 이루지 못한 채 일제에 의해 나라를 강탈당합니다. 다시 말해 조선은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변화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인데도 조선의 지배층은 서양을 오랑캐로 하대하며 개화를 적극 반대하였으니 당시 청년 오경석이 느꼈던 좌절감은 얼마나 컸을까요?



서양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이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에는 성리학의 영향이 큽니다.



성리학은 인간 사이의 관계를 상하질서로 규정하는 사상으로 그 상하질서에는 군주와 신하가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고, 아버지와 아들이 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중화(中華)의 중국, 소중화(小中華)의 조선, 그리고 나머지 ‘오랑캐’가 있을 뿐입니다.



조선 지배층이 서양을 인식하는 말로 사용한 ‘오랑캐’라는 표현을 살펴보면, 조선이 서양으로부터 교훈을 얻기가 왜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한 지식은 서양의 상황을 담은 『해국도지』에 영향을 받아 『해국죽지사』라는 글을 남겼는데, 그 서문에서 서양에 대한 지배층의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천지사방의 바깥에 대해서는 성인은 말하지 않았으니, 저 바다에 사는 ‘어류’나 ‘갑각류’와 사대부주(불교에서 말하는 네 개의 대륙)에서 나는 ‘노린내 나는 짐승들’에 대해서는 붓을 잡고 쓸 가치도 없었다.4)"


오랑캐라는 말은 야만족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만 조선 시대 지배층은 이들에 대해 어류, 갑각류, 노린내 나는 짐승으로 인식했으니 서양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성리학적 사회에서는 중화-소중화-오랑캐의 상하질서가 유지되어야 세상이 바르게 작동한다고 주장됐는데 이를 성리학적 명분론(名分論)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 각자는 자신의 이름이나 위치를 알고 그 분수에 맞게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조선은 이미 소중화이기 때문에 오랑캐로 인식된 다른 나라의 기술 문명의 발전을 겸손한 자세로 배울 수 없었습니다.



또한, 평등사상을 강조하는 서학(천주교)은 당시 지배층에게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무서운 사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서양은 그저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5)



서양이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으로 조선을 무지하고 낙후된 시각으로 바라볼 때 조선 역시 이들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었고, 거기에 평등사상을 전파하는 위험한 세력으로 인식했으니 조선의 입장에서 서양은 배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배척해야 할 열등한 세력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이런 막연한 우월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 1차 아편전쟁에 큰 충격을 받지 못한 것이고, 2차 아편전쟁으로 청 황제가 피난 갈 때 잠시 위기감을 느끼지만 전쟁 이후 다시 안정을 회복한 청 정부를 보면서 조선은 서양의 침략 가능성을 부정하는 낙관적 시각을 갖게 됩니다.6)



이후 조선은 쇄국을 강화하는 방향을 고수하다가 결국 서양의 침략 방식을 답습하여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됩니다.



청년을 위한 역사


1) 한임선 외, 「조선후기 해양경계(海洋境界)와 해금(海禁)」, 『동북아 문화연구』 21,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9.12, 17쪽
2) 김효철 외, 「조선의 선박」, 『한국의 배』, 지성사, 2006, 네이버 지식백과
3) 김한종 외, 「봉수제도」, 『한국사 사전』1, 책과 함께 어린이, 네이버 지식백과
4) 표가령, 「19세기 조선 문인의 『해국도지(海國圖志)』 독서 체험과 문학적 형상화-신필영(申弼永)의 『해국죽지사(海國竹枝詞)』 연구」, 『국문학연구』 43, 국문학회, 2021, 294쪽
5) 전제훈, 「이양선 출몰에 따른 근대문물 인식변화」, 『한국도서연구』 32, 한국도서학회, 2020.12, 14쪽
6) 장보윤, 「아편 전쟁을 바라보는 조선의 다중 시선 – 19세기 중후반 조선 조정, 지식층, 서민층의 대청 인식 연구-」, 『한국사상사학』56, 한국사상사학회 2017, 102쪽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1, 인물사사상사, 2007,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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