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오경석, #008 19세기 중국과 일본의 상황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1

by 연결고리

시대 읽기


#008 19세기 중국과 일본



19세기 정치·경제·기술의 발전을 경험한 서양 제국주의 국가가 동아시아에 진출할 당시, 중국과 일본은 어떤 상황이었고, 서양의 침략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오경석이 관직에 진출하기 전인 1840년, 중국에서는 영국에 의해 아편전쟁이 발발합니다. 당시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淸)’의 시대였고, 만주족이 청을 건설한 지 이미 2백 년이 지난 상황이었습니다.



청은 그 이전 왕조부터 왕래하던 서양 선교사들이나 광저우에 서양 상인이 왕래하면서 서양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습니다. 하지만 청의 입장에서 서양은 견제 대상이기보다는 성리학적 사고에 근거한 주변 오랑캐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청은 시혜적 성격으로 서양과의 교류를 허용했으며, 서양의 정치·경제적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고 수천 년간 이어진 중국의 전제군주제도 여전히 공고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혁명을 거친 영국은 주력 수출품이었던 면제품을 팔며 경제적 이윤을 획득하려고 했는데, 청이 유일하게 무역을 허용한 광저우는 따뜻한 남부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영국의 면제품은 기대만큼 많이 팔리지 않습니다.



반면 중국의 차는 영국의 최대 수입품이었고, 이 때문에 무역 불균형이 심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하게 됩니다.



이 아편이 중국 경제와 중국인의 건강에 큰 피해를 입힌 것은 당연했고, 중국이 아편무역을 단속하자 이것이 발단이 되어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이때 영국은 아편을 더 많이 밀수출하기 위해 ‘의회의 표결’로 정부군을 파견하는 역사적 과오를 저지르는데, 아편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영국의 행위는 제국주의 국가의 추악한 면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아편 전쟁은 19세기 서양 제국주의 침략에 동아시아 국가가 최초로 굴복한 사건이며, 이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며, 불평등 조약의 표본이라고 불리는 ‘난징조약’이 체결됩니다.



이 조약에는 배상금, 영토할양, 강제 개항, 관세 제한이 규정되었고, 추가 조치로 영사 재판권, 최혜국 대우 등의 권리를 서양에 부여하게 됩니다.



이중 영사 재판권은 치외법권이라고도 하며, 외국에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영사가 자국민을 외국법이 아닌 자국법을 따라 재판하는 권리이므로 외국의 통치 권리를 침해하는 제도이고, 최혜국 대우는 한 나라가 가장 유리한 혜택을 부여한 외국과 동등한 대우를 상대국에 제공하는 조치를 말하는데, 상대국으로부터 받은 이익이 없으므로 최혜국 대우를 제공한 국가 입장에서는 큰 손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에게 전쟁에 패해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된 중국이 이후 상식적인 사고와 행동을 보였다면 이후 중국은 서양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는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분명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었고, 청에게는 치욕적인 일이었지만 피해 당사자인 청은 전쟁의 결과에 대수롭지 않다는 안이한 태도를 보입니다.



위기에 처한 상황이라면 보통은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서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모색하겠지만 전제군주제에서 황제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서양의 침략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상황의 심각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태도는 중국의 가장 큰 잘못이었습니다.



이런 자세는 중국과 책봉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 정부에 그대로 전달되어 조선 역시 청의 패배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물론 일부 지식인이 청의 패배를 충격이나 위기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 일부 지식인에 해당하는 반응이었을 뿐입니다.1)



청은 시대적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1차 아편전쟁 이후 태평천국운동이라는 14년간 지속된 농민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서양의 무역 요구에 안일하게 대처하면서 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 여기서도 중국은 패배합니다.



2차 아편전쟁도 서양의 무역 불만이 원인이었는데, 당시 서양 세력은 수도인 베이징 외곽까지 침입하였고, 이 때문에 황제가 수도에서 피난하게 되는 일이 벌어져 청은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까지 몰려야 개혁을 하는 나라가 과연 희망이 있을까요?



청은 더 이상 근대적 개혁을 미룰 수 없어 ‘양무운동’이라는 개혁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이 개혁 운동은 ‘황제 중심의 전통질서는 그대로 유지하고 서양의 기술만을 수용한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근간으로 했기 때문에 개혁은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중국은 서양과 교류할 당시부터 서양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서양과의 전쟁이라는 충격과 굴욕을 경험한 이후에도 황제 중심의 전제적 통치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당시 서양의 침략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1차 아편전쟁이 끝난 후 전쟁의 책임자였던 중국 관리는 패전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갑니다. 이때 그는 서양의 아시아 해양 침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그의 측근에게 서양의 상황을 담아 책으로 편찬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 책이 『해국도지(海國圖志)』입니다.2)



이 책은 세계 각 대륙 주요 국가의 지리, 역사, 정치체제, 종교, 상공업, 함선, 화약, 망원경, 지뢰, 해양 방어전략, 병사 선발과 훈련 방법 등 19세기 중반 서양의 지식을 망라한 세계역사 지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3)



이 책은 일부 지식인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을지언정 청이나 조선 정부의 대외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반면, 일본은 해국도지의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합니다. 자국의 미래를 걱정하여 저술한 중국의 책이 일본에만 영향을 준 것입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에도막부’였습니다. 일본은 고대부터 천황이 최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천황의 권력이 약화되고 12세기 후반부터 무사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이 지배하는 막부정치가 시작됩니다.



쇼군이 지배하는 정치조직을 막부라고 하면, 천황이 지배하는 정치조직은 조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막부시대에 천황이나 조정은 정치적 실권이 없는 형식적인 존재였습니다.



에도막부는 막부시대의 마지막 막부이며, 에도는 도쿄의 옛이름입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성립된 에도막부는 조선이나 청이 겪은 서양의 위협을 비슷한 시기에 함께 경험합니다.



에도막부는 중국과의 지리적 근접성과 섬나라라는 고립성 때문에 조선이나 중국이 보인 태도와 달리 아편전쟁의 결과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당시 일본은 이미 네덜란드와 교역을 하고 있었고 중국 서적, 그리고 네덜란드인이라는 두 가지 루트를 통해 외교 정보를 얻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국도지』가 유입되자 막부관료와 지식인은 서양의 팽창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게 됩니다.4)



막부관료는 네덜란드 상인에게 “만주족(청나라를 건국한 세력)은 제법 용맹하다고 들었는데 왜 전쟁에서 졌는가?”라고 물었는데, 네덜란드 상인은 “용기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병법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한다. 불과 4천 명의 병사로 중국의 거대한 영토를 정복한 데서 볼 수 있듯이 모든 변방의 나라는 유럽의 어떤 나라와도 경쟁상대가 될 수 없다”라고 답변합니다.5)



이후 미국이 군함을 이끌고 와 통상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이자 막부는 그들과 싸우기보다는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하며 개항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에도막부 역시 쇼군을 중심으로 한 전근대적 전제적 통치방식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항 이후 서양의 경제적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군사적으로도 서양의 상대가 되지 못해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 조성됩니다. 이에 막부 반대 세력은 천황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에도막부를 무너뜨립니다.



그리하여 1868년, 천황이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복귀하는 ‘메이지유신’이 달성됩니다. 그리고 일본은 서양을 적극적으로 모방하여 신분제 폐지, 의무교육, 징병제 등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추진하게 됩니다.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 중 의미가 있었던 것은 대규모 정부 사절단인 이와쿠라 사절단을 서양에 파견한 것인데, 여기에는 한반도 국권 강탈의 주범인 이토 히로부미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서양의 변화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고, 당시 국제적으로 미약한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때 특이한 것은 사절단에 어린 남녀 아이들을 동행시켜 미국과 유럽 등에 유학시킨 것인데, 이런 활동은 훗날 일본 개혁의 중요한 밑거름이 됩니다.6)


이렇게 같은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했던 두 나라는 근대화라는 관점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청년을 위한 청년 역사-


1) 장보윤, 「아편 전쟁을 바라보는 조선의 다중 시선 – 19세기 중후반 조선 조정, 지식층, 서민층의 대청 인식 연구-」, 『한국사상사학』56, 한국사상사학회 2017, 102쪽


2) 표가령, 「19세기 조선 문인의 『해국도지(海國圖志)』 독서 체험과 문학적 형상화-신필영(申弼永)의 『해국죽지사(海國竹枝詞)』 연구」, 『국문학연구』 43, 국문학회, 2021, 288쪽
3) 최형섭 외, 「해국도지」,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중국문학』, 위키미디어 커먼즈, 2013, 네이버 지식백과
4) 마리우스 B.젠슨, 『현대일본을 찾아서』1, 이산, 2006, 405쪽
5) 마리우스 B.젠슨, 『현대일본을 찾아서』1, 이산, 2006, 409쪽
6) 박석순 외, 「이와쿠라(岩倉) 사절단과 정한론」, 『일본사』, 미래엔, 2009,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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