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1
오경석의 또 다른 조력자, 박규수(1807~1876)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박규수는 유홍기와 달리 문과에 합격한 양반이었고, 오경석과의 나이 차도 스무 살이 넘었습니다. 정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오경석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가 청년 오경석을 만났을 때 그는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였습니다. 그런 박규수가 청년 오경석의 의견에 따라 개화사상을 일구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박규수는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조선시대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입니다.
『열하일기』는 청나라 황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단에 박지원이 참여하여, 황제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6개월의 경험을 기록한 글입니다. 이 글에는 그의 풍자적인 표현을 빌려 그 당시 오랑캐라고 비판하던 청이더라도 앞선 기술과 문명은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양반전』은 몰락한 양반이 세금을 내지 못해 부자 평민에게 양반 문서를 팔려고 하자 군수가 개입하여 평민에게 양반의 허례허식과 부정부패를 알게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평민은 결국 양반 되기를 포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허생전』은 과거를 준비하던 가난한 양반 허생이 아내의 잔소리에 집을 나와 물건을 매점매석하여 거부가 되고, 그 돈으로 도적들을 섬나라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허생전』에는 병자호란을 복수하기 위해 임금을 모시는 대장에게 외척의 권력을 빼앗거나 우수한 자제에게 오랑캐의 복장을 입혀 중국에 유학 보내 장사시키는 방책 등이 언급되는데 임금을 모시는 대장은 그런 것들이 조선의 예법에 어긋난다며 모두 거절하는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1)
이들 책은 공통적으로 조선은 허례허식을 버리고, 청을 배워야 한다는 ‘개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박지원의 사상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병자호란은 17세기 만주족이 청을 세우고 조선을 침략한 사건입니다. 병자호란의 결과 조선은 패배하고, 청의 황제는 조선의 인조로부터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한 번 절할 때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3번 하는데 이를 3회 반복하는 절)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오랑캐와 군신 관계를 체결한 굴욕적인 사건이었으며, 이후 청은 조선이 숭상했던 한족의 나라, 명(明)을 멸망시킵니다.
당시 청에 대한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북(北)으로 지칭됐던 청을 정벌하자는 의견이 조선의 대세가 되었는데 이를 북벌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청을 정벌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고, 시간이 흘러 청이 중국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게 되자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청의 선진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북학파입니다.
청에 대한 반감은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2백 년이 지난 오경석의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박지원 시대의 북학파 사상은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지원은 박규수가 태어나기 전에 생을 마감하지만, 청을 배우자는 할아버지의 사상은 그대로 손자에게 계승됩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였던 것입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이 안타까울 때가 많은데, 박규수에게도 그런 과거가 존재합니다. 세도정치 시절 20대의 청년 박규수는 개혁적인 성향의 세자와 친분을 갖게 됩니다.
‘만약’ 박규수와 친분이 있었던 세자가 일찍 죽지 않고 정권을 잡았다면 조선시대 세도정치는 쉽게 막을 내렸을지도 모르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규수와 친분이 있던 개혁적인 성향의 세자는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이었던 효명세자(익종)입니다.
조선 후기의 황금기로 불린 정조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어린 순조가 집권합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지만 소수 명문 가문이 주도하는 정치 질서를 개혁하지 못하고, 건강도 악화되자 안동김씨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합니다.
순조는 이런 상황에서 아들인 효명세자에게 권력을 넘기고 자신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납니다. 이에 효명세자는 안동김씨 세력을 배제하며 아버지와 같이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데, 허망하게도 3년 만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의 어린 아들 헌종을 지나 철종까지 세도정치가 계속됩니다.2)
효명세자는 생전에 박규수가 박지원의 손자인 것을 알고 그를 기용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생을 마감하자 박규수는 과거를 그만두고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은둔합니다.
은둔생활을 끝낸 박규수는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데, 부정부패가 횡행했던 세도정치 시절 그의 청렴함은 더욱 인정받아 그는 중앙 관직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때가 1850년대, 박규수가 40대 중반의 나이였으며, 오경석은 20대 청년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후 왕의 최측근인 승지(왕명을 전달하는 역할)로 활동하다가 2차 아편전쟁이 끝난 다음 해, 중국 사신단의 부사(副使, 사신단의 우두머리인 정사를 보좌하는 역할)로 중국을 다녀옵니다.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났을 때는 사태 수습을 위해 박규수가 파견되었는데, 당시 그는 탐관오리에 대한 엄중 처벌을 요청했으나 안타깝게도 조선의 개혁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던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릴 때 이를 제압한 인물도 바로 평양 관찰사(각 도에 파견된 지방 행정 최고 책임자)였던 박규수였습니다.3)
박규수는 최고 지배층의 자리에서 조선의 부패상을 직접 목격하였고, 서양 침략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병인양요가 일어난 지 3년 후 중앙으로 다시 복귀한 60대의 박규수는 30대 후반의 오경석과 만나 나라의 위기를 논의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오경석·유홍기·박규수는 개화사상의 동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후 박규수는 두 번째 중국 사신단에 참여할 때 우두머리인 정사(正使)의 지위로 사신단을 지휘하게 되는데, 이때 통역관의 수석자리에 오경석을 지명하여 데려갑니다.
훗날 박규수는 삼정승의 하나인 정1품 우의정이라는 조선 최고 관직에까지 오르게 되는데, 이 시기는 오경석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에게 여러 차례 개국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사직하고, 이후 오경석의 뜻을 따라 북촌의 양반 자제들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 개화사상을 전파합니다. 그리고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70세의 나이로 오경석과 함께 정부 당국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쓴 후 그해 생을 마감합니다.4)
조선 최고의 명예를 누렸으면서도 권력에 아부하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70대가 다 되어가는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국가 최고 권력자를 설득하려던 그의 책임 있는 자세는 ‘장년’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역경에 도전하는 것이 청년의 역할이라면, 장년의 그것은 위기의 때에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닐까요?
청년 오경석이 자신의 진정성과 능력을 신뢰해 준 장년 박규수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사실 중인 출신의 오경석이 지체 높은 양반 가문의 자제들을 따로 불러 교육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우의정을 지낸 정치 원로 박규수가 없었다면 개화 세력을 양성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5)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유홍기, 박규수가 없었다면 오경석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물의 업적을 읽을 때 그 인물 한 사람의 능력에만 초점 맞추기보다는 ‘조력자’의 존재를 살펴야 합니다.
시대의 성공은 ‘혼자’가 아닌 ‘함께’ 이룬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1) 윤승준, 「『열하일기』의 우언 읽기」, 『배달말』47, 배달말학회, 2010, 247쪽
「열하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2) 김범, 「효명세자」, 『인물한국사』, 2012, 네이버 지식백과
「순조」,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정성희, 「박규수」, 『인물한국사』, 2011, 네이버 지식백과
4)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53쪽
「박규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5)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68-1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