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
대한제국의 군대 개혁은 육군에 관한 것이고 근대적 해군은 전혀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해군 양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서양 제국주의 침략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해군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양 열강 간의 해군 육성 경쟁은 치열했습니다. 19세기 유럽 해군의 주력 군함은 철제 장갑을 입힌 장갑함이었는데 이런 장갑함은 방어력이 강력한 만큼 무게가 무거웠으므로 증기력 추진이 아니면 배가 충분한 속도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증기로 추진되는 장갑함의 숫자가 유럽 각국의 해군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1)
이 때문에 증기선 보급을 위한 경쟁이 일어났고, 19세기 말 군함과 상선을 포함한 증기선 수는 영국이 5천 척 이상, 프랑스는 5백 척, 러시아는 3백 척 정도였습니다.2)
러일전쟁 당시 유럽 해군력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각각 유럽 해군력 1위에서 4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당시 러시아는 일본 육군의 약 13배, 해군은 3.9배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당시 해군력 1위였던 영국이 군함의 건조·구입·운반에서 일본을 돕지 않았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3)
군함 경쟁이 한창일 때 일본 역시 해군력 증진을 위해 노력합니다. 청일전쟁 승리로 청 군함 11척을 확보하고, 청일전쟁에 사용한 전비와 맞먹는 2억 1,310만 엔을 투자하여 군함을 포함한 106척의 배를 건조합니다. 그리하여 10년 만에 2배 이상의 전력 증강을 달성합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해군력은 러시아에 비해 역부족이었는데, 이때 일본은 영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83척(246,233톤)의 군함을 운영할 수 있었고, 62척(184,574톤)에 불과했던 러시아 극동함대를 러일전쟁에서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4)
근대식 군함인 운요호를 영국으로부터 구입하고, 이를 활용하여 1875년 군사적 도발을 감행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의 문호를 개방했던 일본이 30년이 채 되지 않은 기간에 유럽과 견줄만한 해군력을 보유하게 된 것은 조선에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대한제국에서 근대 해군 창설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한제국은 근대 해군 창설을 위해 고종의 뜻에 따라 1903년 양무호를 들여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배의 도입은 정부의 무능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양무호는 영국이 1881년 건조한 원양 화물선을 1894년 일본의 미쓰이 물산이 구입해 9년간 써먹은 석탄 운반선이었습니다. 이 배를 고종은 110만 원(55만 엔)을 들여 구입하는데, 이 비용은 미쓰이 물산이 9년 전 영국으로부터 구매한 금액의 2배가 넘는 금액이었고, 당시 대한제국 예산의 10%, 국방 예산의 30%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은 낡은 화물선에 대포를 달아 근대식 군함으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선원·선장도 없이 무턱대고 배부터 구입합니다. 이 때문에 하루에 석탄 45톤을 소모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인천항에 무작정 방치하게 됩니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양무호는 일본군에 징발되어 화물선으로 다시 쓰이는 수모를 겪게 되고, 1907년 군대 해산 뒤엔 해양 실습선이 되다가 1909년 경매에 붙여져 다시 일본 상회에 팔립니다. 그리고 1916년 철광석을 싣고 가다가 침몰하게 됩니다.5)
양무호는 구입 당시 실제로 군함으로 활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은 다시 일본의 조선소에 군함 건조를 주문합니다. 이것이 광제호이며 당시 최신 기선이었습니다. 광제호는 1904년 말 건조가 완료되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광제호는 해군 군함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감시선으로 전락합니다. 또한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운영하고, 일본의 대륙침략 활동에 이 배를 사용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은 해군을 제대로 운영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6)
대한제국의 안타까운 상황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 해군의 발전과 대비됩니다. 영국은 1906년 드레드노트 호를 진수시키는데 이 배는 그 이전의 모든 전함을 퇴물로 만들면서 ‘드레드노트 급’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혁신적인 전함이었습니다. 이 배는 기존의 전함들의 주포인 8인치 함포를 방어할 수 있는 두꺼운 장갑을 둘렀으며, 기존의 전함들을 일격에 격파할 수 있는 12인치 함포를 무려 10문이나 장착하였습니다. 또한 함포마다 개별 사격 통제를 해 오던 방식과는 달리 중앙에서 통제할 수 있었고 명중률도 향상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형 함에는 사용된 적이 없던 증기 터빈 추진을 장착하여 쾌속 항진이 가능하게 됩니다.7)
20세기 초 국가 간 무력 경쟁이 무서운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대한제국의 육군은 그 규모와 화력에서 제국주의 열강을 상대하기는커녕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도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적 해군 창설은 더욱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정부군이 제국주의 열강과 충돌한 적은 있지만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조선군은 왕의 명령을 받아 제국주의 열강과 과감한 전투를 벌인 적이 없었습니다.
조선은 청이나 일본의 영향력 속에 효과적인 군사 개혁을 이루지 못했고, 동학농민운동이 마무리될 당시 군대 철수 요청을 무시하고 일본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할 때 소요된 시간은 굴욕적이게도 30분에 불과했습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에도 조선은 군대를 동원하여 저항하지 못했고, 고종의 퇴위를 그저 지켜만 봤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군대 해산이라는 수모를 당합니다.
근대적 군사 개혁의 가장 큰 장애는 ‘일제의 불법적인 무력 침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개혁 역량에 뚜렷한 한계를 보인 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점입니다.
1) 석영달, 「19세기 증기선의 도입과 영국 해군의 변화―해외 해군 기지 변화를 중심으로―」, 『영국연구』30, 영국사학회, 2013, 149쪽
2) 석영달, 「19세기 증기선의 도입과 영국 해군의 변화―해외 해군 기지 변화를 중심으로―」, 『영국연구』30, 영국사학회, 2013, 169쪽
3) 김태준, 「러일전쟁기 영일동맹이 일본해군의 승전에 미친 영향」, 『군사』5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4, 348-352쪽
4) 김태준, 「러일전쟁기 영일동맹이 일본해군의 승전에 미친 영향」, 『군사』5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4, 349·351쪽
5) 「[오늘의 경제소사/4월15일] 양무호」, 서울경제, 2008.4.14.
성현석, 「정부는 돈 쓰는 실력으로 평가 받는다」, 『인물과 사상사』252, 인물과 사상사, 2019.4, 153-154쪽
6) 「광제호」,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7) 남도현, 「전함 드레드노트」, 『무기의 세계』, 유용원의 군사세계, 2015, 네이버 지식백과
「드레드노트」,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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