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2년이 지난 1878년, 신돌석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평민이었고, 그가 태어난 마을은 양반이 없는 일반 민촌이었습니다.
신분은 평민이었지만 아버지의 노력으로 부를 쌓았기 때문에 신돌석의 집안은 부유했습니다. 물론 신돌석의 아버지는 아들이 의병 활동을 시작하자 집과 토지를 포함하여 자신이 어렵게 벌어들인 재산 대부분을 아들의 의병자금으로 내놓습니다.1) 신돌석은 그런 ‘의로운’ 청년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신돌석은 평민이었지만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서인지 인근 마을의 양반집에서 한문 배울 기회를 얻습니다. 물론 경제력이 있다고 해서 그 당시에 지금처럼 원하는 대로 학문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물 명단이 등재된 현존하는 조선시대 서당 문서는 단 2개뿐입니다. 여기에 등재된 인물들에는 평민은 없으며, 모두 과거에 합격했거나,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채 학문에 매진하던 유생뿐이었습니다.2) 이 2개의 문서로 조선시대 서당의 상황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신분제가 존재하는 시대에 평민이 양반과 대등하게 공부할 수 없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 서당에서 배우기는 원하지만 가난해서 학업이 불가능한 자가 있으면 서당의 재원으로 이들을 교육시키려는 서당이 있었습니다.3) 물론 이 방침이 평민의 자녀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양반전』에 묘사되었듯이 돈 많은 부농이 양반 신분을 구매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또 중인층을 중심으로 서당이 운영되거나 서당 교재가 출현하고, 서당의 훈장이 민란에 함께 참여하는 현상도 나타납니다.
이런 정황을 바탕으로 평민의 학문 접근성이 좋아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양반은 오히려 신분제의 동요를 억제하기 위해 집성촌(集姓村,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이 모여 사는 촌락)을 이루어 서당을 설립하고, 신분적 차등 윤리를 향촌 사회에 더욱 엄격하게 정착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조선 후기 서당 설립의 가장 중요한 주도 세력은 동족 마을이었기 때문에 서당은 문중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문중의 세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4)
신돌석이 공부를 시작했던 서당 역시 양반의 동족 마을에서 운영했던 서당이었기 때문에 그가 서당에 들어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신돌석이 양반집에서 한문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시대 상황과는 다르게 평민을 받아 준 너그러운 선비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돌석이 16세 되던 해에 그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그 고마운 선비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신돌석은 계속 배우고 싶었지만, 신분적으로 평민을 차별하는 분위기 때문에 이후 신돌석을 받아주는 곳이 없자 공부를 포기하게 됩니다.5)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에 신돌석이 느낀 신분적 한계는 큰 상처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가 18세가 되던 1895년, 서울에서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이어서 단발령이 시행되자 유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을미의병을 일으킵니다. 다음 해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19세의 청년 신돌석은 처음으로 의병 활동에 가담합니다. 당시 서울에서는 미국에서 귀국한 청년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행하며 나라 개혁을 위해 힘쓰고 있었으니 둘은 서로를 몰랐지만 각자 자신이 있는 곳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도전했습니다.
20대가 된 청년 신돌석은 전신주를 세우는 일본 병사를 사살하거나 부산항에서 일본 배를 부수는 등의 행동을 통해 본격적인 항일 의식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신돌석은 조약 체결 다음 해, 자신의 지역에서 29세의 나이로 드디어 평민 의병장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의 활동에 지방민 3,000여 명이 가세할 정도로 그는 지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6)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에 이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은 정미의병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합니다. 전국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13도 연합의병대를 편성하고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치려는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합니다. 청년 신돌석은 30세의 나이로 경상도 의병을 대표하는 의병장이 되어 1,000여 명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신돌석에게 부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는 처음에 13도 연합의병대를 대표하는 8명의 대장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으나, 이후 양반 의병장들은 13도 연합의병대에서 신돌석의 대장 자리를 양반 유생으로 대체했고, 서울진공작전의 부대 개편에서 신돌석 부대는 제외되고 맙니다.
결국 13도 연합의병대를 대표하는 의병대장은 양반, 유생 출신으로만 편성되었고, 신돌석뿐 아니라 또 다른 평민 출신 의병장 홍범도도 배제되었기 때문에 13도 연합의병대는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7)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순수한 의로움을 품고 헌신적으로 의병 활동을 했지만,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일에서조차 신분적 차별을 받아야 했던 청년은 서당에서 배척당하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또다시 신분으로 배척되는 현실에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겪을 때 그곳에서 발을 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는 13도 연합의병대에서 배척된 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지역에서 지역민을 지키기 위한 항일투쟁을 이어갑니다.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는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민중 기반의 항일 활동을 펼쳤으며, 교묘한 게릴라 전법으로 일본군에 큰 피해를 주었던 신돌석. 그는 엄격한 군율을 유지했고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힘썼기 때문에 일부 비난받던 유생 의병장들과는 다르게 이르는 곳마다 민중의 환영과 보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조선 정부에 의해 청년 신돌석은 ‘범죄자’ 신분이 되었고, 일본군과 정부군은 청년 신돌석을 토벌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고종은 퇴위 되고, 대한제국 군대는 해산되었으며,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완용을 내각 총리대신으로 삼아 대한제국의 행정권을 거의 장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돌석은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이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만주로 넘어가 항일투쟁을 이어갈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걸어 놓은 현상금 때문에 부하에게 배신당하여 한창 뜻을 펼쳐야 할 31세라는 이른 나이에 허무하게 생을 마감합니다.8)
그는 풍족한 상황에 안주하면서 더 많은 돈을 모아 관직을 매수하여 출세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의 재산을 처분하면서까지 함께한 의병들을 보살폈고,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을 피하는 불편을 감내하면서도 엄격한 규율로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양반 의병장들로부터 신분적 모욕을 받았어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 끝까지 옳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평민’이자 ‘폭도’로 규정되었고, 동료의 배신으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지만, 민족을 위한 그의 ‘의로움’은 지금 이 시대에도 이어져 또 다른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1)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0-12쪽
2) 고수연, 「17세기 忠淸道 沃川 資風書堂의 운영과 인적구성」, 『지방사와 지방문화』24, 역사문화학회, 2021.11, 259쪽
3) 김경용, 「조선전기 서당교육에 대한 試論」, 『교육사학연구』27, 교육사학회, 2017.11, 20쪽
4) 「서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5)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23쪽
6) 「신돌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7) 「신돌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8) 「신돌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강윤정, 『신돌석』, 역사공간, 2016, 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