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신돌석, #046 불의한 시대의 저항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by 연결고리


3 신돌석(1878 ~ 1908) / 나라를 구하려 무력을 사용한 평민 청년, 범죄자가 되어 탄압받고 배신자에 의해 암살되다 / 분야 의병



1894 동학농민운동, 일본경복궁 점령, 갑오개혁, 청일전쟁
1895 삼국간섭, 을미사변, 을미개혁, 을미의병 시작
1896 아관파천, 독립신문 간행, 독립협회 결성, 신돌석 을미의병 가담
1897 대한제국 수립 /20세
1899 경인선 개통, 대한국 국제 공포, 독립신문 폐간
1900 종로에 처음으로 전등 가설
1903 서양식 군함 양무호 도입
1904 러일전쟁, 친일단체 유신회(일진회) 조직, 경부선 완공
1905 일본 독도 강점, 경의선 완공, 을사늑약 체결, 을사의병 시작
1906 이토 히로부미 초대통감 부임, 신돌석 평민의병장으로 을사의병 가담
1907 국채보상운동, 헤이그특사 파견, 고종 퇴위, 정미7조약 체결, 군대 해산, 정미의병 시작, 신민회 설립 /30세
1908 서울진공작전 실패, 신돌석 사망



주요 업적과 생애 요약



#046 불의한 시대의 저항, 신돌석의 업적



불법적으로 행사되는 물리력은 폭력(暴力)이지만 국가가 행사하는 물리력은 합법적인 ‘공권력’으로 간주됩니다.


그런데 국가가 불의하면 국가의 공권력 행사는 사회적 합의를 벗어나 과도한 형태를 띠게 됩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나서야 하는데, 이때 국민들의 저항은 ‘어느 수준’까지 허용이 되어야 할까요?


기본적으로 국민들은 법의 지배를 받으므로, 그 저항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법에서는 민간인들의 ‘물리력 행사’가 일반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불의한 정부는 체제 유지를 위해 공권력의 수준을 넘어 폭력을 행사할 것이고, 이 정부가 만약 외세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 정부라면 더욱 외세의 입맛에 따라 불법을 자행할 것입니다.


공권력을 직접 행사하는 군인, 경찰, 판사, 공무원들 중에는 그것이 과도한 형태를 띨 때 권력 행사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나 독재 시기처럼 시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발포’에 이르는 폭력을 행사하거나 저항 세력에게 중한 형벌을 언도할 것입니다.


국가 권력의 불법적 행사에 복종을 거부하거나 실력행사를 통해 저항할 수 있는 국민의 근대적 권리로 ‘저항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에 저항권을 명시한 규정은 없지만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구를 저항권의 근거 규정으로 삼고 있습니다.1) 따라서 국가가 불의할 때 국민의 저항 수준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국민이 용인하는 물리적 실력 행사까지 허용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론적으로 국민들의 물리력 행사가 용인되어야 한다고 이해해도,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에 있습니다.


국민들이 정부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물리력을 사용하여 저항한다면 정부는 자기 잘못을 반성하기보다 국민의 물리력 행사를 ‘폭력’으로, 저항하는 국민을 ‘폭도(暴徒)’로 규정하여 탄압하게 됩니다. 국민의 저항 결과, 만약 기존의 정부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부가 수립된다면 저항 세력들은 사면받고 역사적으로 의롭다는 평가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합법적인 물리력을 독점한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 저항은 실패할 확률이 높고, 저항 세력은 혹독한 처벌을 경험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이런 이유로 불의한 시대에 이득을 본 세력들은 정부의 부당함을 눈감아 줄 것이고, 정부의 만행이 잘못되었다고 인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탄압이 두려워 섣불리 나서지 못하게 됩니다.


불의한 시대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대신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 바라는 안일한 태도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를 믿지 못하고 나의 안전과 성공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만연하다면 시대의 불법은 더욱 바로잡을 수 없게 됩니다. 게다가 정부가 공권력으로 공포정치를 조성한다면, 저항권의 개념을 배웠고 물리력을 동원해 저항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누구도 정부와 쉽게 싸우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개인이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분제도가 폐지되고, 독립을 달성하며, 독재 정치를 무너뜨린 역사 발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이 겪게 될 혹독함을 알면서도 불의함을 참을 수 없었던 ‘의인’이 우리 사회에 항상 존재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들 의인들은 당시에는 권력으로부터 불법으로 매도되었고 탄압의 끝이 보이지 않았던 상황에서도 옳은 일을 위해 끝까지 견디며 도전을 이어왔습니다.


여기 불의한 시대에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 나선 청년 의인이 하나 있다고 합시다. 당시 정부는 일제에 권력을 빼앗겨 외세의 앞잡이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저항하지 않으면 나라는 식민지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청년은 저항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고, 혼자 힘으로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의병을 조직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의로운’ 것이었지만, 정부는 그들을 ‘폭도’로 규정하였고 탄압을 가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정부의 입장에서 ‘불법’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도운 사람들은 함께 범법자가 되어 탄압받았고, 정부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곳곳에 밀정까지 심어두었습니다.


그들은 ‘역적’이 된 상황이므로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 없게 되었고, 거병 초기에 지역민의 지지를 얻었더라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정부와 일제의 탄압 속에 자금, 물자보급, 근거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청년과 함께 의로운 행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공짜로 봉사한 것이 아니라 활동의 ‘대가’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값을 치르기 위해 가족의 재산을 탕진했고, 지역민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로운 일보다 ‘돈’을 우선한 어떤 사람들은 청년의 이름을 내걸고 지역민을 약탈하게 됩니다.


열악한 자금 사정과 화력의 열세로 정부와의 무력 충돌이 빈번할수록 피해는 커졌고, 의병을 도운 지역민에 대한 정부의 괴롭힘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청년의 이름을 내세운 약탈 행위에 대한 반감이 생기자 시간이 갈수록 청년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의한 정부에 체포되거나 투항하면서 ‘의로운 활동’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저항 세력 사이에 균열은 심해져 마지막에는 청년을 밀고하여 ‘배신’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불의한 시대에 저항한다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을 거친다는 뜻이고,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이 시작된 시기 ‘의병(義兵)’이라고 불린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안타까운 최후를 맞습니다. 그 과정을 겪은 청년이 바로 신돌석입니다.


신돌석은 이 글에서 다룬 인물 중 처음으로 청년의 시절에 생을 마감한 인물입니다. 그는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잘 알려진 인물인데, 평민 출신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평민이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의병으로 불렸으나 공식적으로는 정부로부터 폭도로 매도되었기에 나라 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라를 구하는 일에서까지 신분 차별을 당하는 상황이었다면 청년 자신은 옳은 일을 하면서 얼마나 그 상황이 원통했을까요?


평민이었기 때문에 의로운 행위로 겪은 그의 고난은 양반 유생보다 더 고됐지만, 평민 의병장은 유생 의병장과 달리 대부분 자신의 의병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2) 신돌석 역시 그가 겪은 고난의 깊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어렵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의인’들의 업적을 기념하면서도 그들 각자가 겪었던 고통을 상상해보는 경우는 많지 않은 지금의 시대에, 신분 차별과 외세의 간섭이라는 시대 구조 속에 평민이자 의병장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청년 신돌석은 불의에 맞설 수 있게 하는 ‘의로움’의 가치를 되새기게 할 것입니다.



1) 「저항권」,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2) 오영섭, 「한말의병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군사』5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8, 78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