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신돌석, #048 조선의 군대 개혁과 좌절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Ⅲ

by 연결고리


시대 읽기



#048 조선의 군대 개혁과 좌절



의병이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의 군대 개혁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의 신식 군대는 1881년의 별기군으로 시작됩니다. 별기군은 다음 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해체되고, 일본으로 군사 유학을 다녀온 서재필의 건의로 임시 사관학교인 조련국이 만들어지는가 싶었지만, 민씨 세력의 방해로 그 활동은 조선 사관학교 설립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게다가 일본을 다녀온 군사 유학생들은 군대 개혁에서 배제되고 조선의 군대는 청에 의해 개편되면서 조선의 군대는 청의 원조를 바탕으로 무장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1)


갑신정변 발발 이후 조선은 미국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청 간섭으로 설치된 군영들을 잠시 개편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군제개혁은 중앙군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지방군은 별다른 발전을 이루지 못합니다.2)


1888년에는 미국으로부터 초빙된 군사교관에 의해 연무공원이라는 사관 양성학교가 드디어 설립됩니다. 하지만 정부의 재정난, 담당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 담당 관료와 교관들 간의 불화, 기성 군인과 청의 방해 등으로 초기에 활발했던 모습은 점차 사라져갔고, 1894년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킨 후 신식 무기를 약탈했기 때문에 연무공원도 자연히 사라지게 됩니다.3)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의 영향 속에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일본은 조선에 훈련대 설치를 건의하여 일본군의 지도하에 군대가 구성됩니다. 그런데 삼국간섭에 의해 일제의 세력이 약화되자 독자적으로 국왕 호위 군대인 시위대가 미국 장교의 지도 아래 편성됩니다.


민비 세력은 시위대를 옹호하였고, 일본의 영향을 받은 훈련대를 해산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자 일본 공사는 훈련대 대장이었던 우범선과 훈련대 군인을 을미사변에 동원하자 훈련대와 시위대는 서로 충돌합니다. 이후 시위대는 훈련대와의 충돌이유로 훈련대에 흡수됩니다. 하지만 왕비 시해에 대한 비난이 격렬해지고 친러시아 세력이 주도권을 잡자 훈련대는 해산되고 친위대라는 중앙군이 다시 조직됩니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친위대를 증강하였고, 국왕 호위 군대인 시위대도 다시 조직합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군제 개혁을 명목으로 친위대를 폐지하고, 1907년 군대 해산식에서는 시위대도 폐지되며 조선의 중앙군은 해산됩니다.


지방군의 개혁은 지지부진하다가 훈련대가 해산되고 친위대가 조직될 당시 진위대로 불리는 최초의 근대적 지방군이 설치됩니다. 이로써 서울 수비는 친위대가, 지방 수비는 진위대가 맡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이 1907년 중앙군을 해산하면서 진위대도 해산되자 이들은 지방의 의병부대와 항일 연합전선을 펼치게 됩니다.4)


다시 정리하면 중앙군은 별기군 이후 훈련대, 시위대, 친위대 등이 조직되었고, 지방군은 갑오개혁 이후 진위대가 설치됩니다. 하지만 외세의 영향력 속에 군사적 자립을 달성하지 못했고, 1907년 일본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조선의 군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대한제국은 1900년대 초반 정부 예산의 40% 가까이를 군사비로 지출하며 군제 개혁에 힘을 쏟지만, 이는 외세와의 대결에 대비한 국방 개혁보다는 주로 황실 수비와 지방 치안 유지 등 내부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지출이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5)


그리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시 중앙군의 규모는 1만 명에 미치지 못했고,6) 1900년대 초반 지방군을 재편한 진위대 역시 그 규모를 18,000명으로 유지하려 했으나 재정 문제로 1만 명 정도로 감축 운영하였습니다.7) 1900년대 초반 중앙군과 지방군을 모두 합쳐봤자 정규군은 2만 명이 안 되는 규모였던 것입니다.


반면 일본 육군은 매년 약 30만 명을 징병하여 평시 전력을 유지했는데,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동원한 병력이 120만 명임을 고려할 때 조선의 열악한 국방력 수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8)


일제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후 1907년 조선의 군대를 해산하기까지 조선의 군대가 일제에 대항하여 이렇다 할 무력 충돌이나 군사적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은 역사 교과서마다 다루고 있는 의병 활동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깊이 반성해야 할 점입니다. 그 시대에는 이순신과 같은 인물이 없었던 걸까요?



조선의 군대가 국민을 보호할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 당시 의병 활동은 반드시 존재해야 했습니다. 조선의 정규군이 맥없이 무너진 상황에서 만약 의병까지 일어나지 않았다면 조선은 저항 없이 식민지를 받아들인 나라라는 역사적 비아냥을 듣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국권이 무너질 때 국민이라면 반드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1) 강성문, 「한말 조선군대의 근대화 노력」, 『군사』1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988.8, 89쪽
2)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8, 국사편찬위원회, 2002, 155쪽
3)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8, 국사편찬위원회, 2002, 157쪽
4) 「훈련대」·「시위대」·「친위대」·「지방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5)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2, 국사편찬위원회, 2002, 55·60쪽
6)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2, 국사편찬위원회, 2002, 284쪽
7) 김기성, 「대한제국기 진위대 증설의 재정적 영향」, 『역사와 현실』90, 한국역사연구회, 2013.12, 203쪽
8) 신효승, 「러일전쟁 이후 일본육군의 팽창과 徵兵 管區 변화」, 『학림』,43, 동북아역사재단, 2019.3, 34쪽
문종현, 「프랑스 파견무관(attaché militaire)이 본 러일전쟁: 제0차 세계대전에서제1차 세계대전으로」, 『HOMO MIGRANS』 21, 이주사학회, 2019.11, 86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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