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알고 있는 사실 1)기자조선, 2)위만조선, 3)한사군, 4)임나
9000년 한국사 국통맥 서론
우리 한민족사의 국통맥을 살펴보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가 있습니다.
가장 우선 환국과 배달의 역사 그리고 고조선에 이르는 고대 역사에 대해여 무지 했습니다.
그리고 고대 역사와 사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잇는 북부여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하였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온전하게 알지 못하고 지킬 힘이 없어 지키지 못한 잘못이 큽니다. 또한 우리 고대 국가의 가르침을 받던 중국이 강성해지면서 은혜를 원수로 갚으며, 자신들 열등감을 숨기고,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우리 역사를 왜곡하였기 대문이기도 합니다. 그 부분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 기자조선인데 기자조선은 실제 하지도 않고 오직 중국의 일부 사서에 등장하는 것뿐인데, 유교(이 씨) 조선에서 받아들여 명나라에 사대하면서 가지고 있던 고대 역사서를 없애고, 왜곡하여 본류 국통맥을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고려시기에 몽골의 침략으로 우리나라의 정통이 외면당하고 몽골의 신하국이 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 위만의 경우 번조선 일부를 침달당한 위만정권에 대하여 조선 전체를 잃은 것처럼 알게 되었고, 문무제 때 있지도 않은 3) 한사군이 설치되었다고 거짓의 식민 역사로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4) 임나에 대한 부분과 여러 역사적 유물까지 훼손하면서까지 일본은 역사 왜곡을 자행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식민사관에 정책에 의하여 잘못된 역사서와 왜곡된 역사를 아직도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을 통하여 북부여 시기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국통맥을 살펴보고, 올바른 역사를 배우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에 대하여 뼈저리게 아픔을 느끼고 역사의식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그것만이 후세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길일 것입니다.
환국->배달->조선->북부여(열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4국 시대)->대진과 신라(남북국시대)->고려->유교조선->임시정부->대한민국과 북조선(분단시대)
대한민국과 북조선(분단시대)->임시정부->유교조선->고려->대진과 신라(남북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4국시대)->북부여(열국시대)->조선->배달->환국
국통맥(國統脈)의 중요성
우선 잘 알려진 사서를 살펴보면
삼국사기 -> 김부식의 사대주의 의식으로 쓰인 신라중심 삼국시대의 역사서입니다.
삼국유사 -> 뿌리를 밝히려는 노력을 하였고, 정사에 누락된 부분을 채우려 노력했으나 조각난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요 부분을 신화적인 요소로 변형되어 있습니다. 사실과 다른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습니다.
안함로선생님의 삼성기상에서 환국->배달->조선->부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사의 국통맥을 밝히고 고주몽이 북부여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한민족 정신문화인 신교문화의 상수철학과 삼신, 칠성문화의 원형을 상세히 밝혔다. 유교조선 때 세조, 예종, 성종 때에 팔도관찰사에게 안함로, 원동중 삼성기를 유교이념에 어긋나고, 반 한다는 명목으로 서적 수거령을 내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대주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배달과 조선 때에는 조공을 하며 조선에서 많은 것을 배워간 중국이 진나라 때 처음으로 황제라 칭하며, 진시황이라 하며, 천자를 계승했다고 이전의 역사를 다시 쓰고 역사왜곡을 시작합니다. 그 후 규모가 커지고, 힘이 세지자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 벌어집니다. 한나라 때 침공, 위나라 관구검, 수나라, 당나라 침공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중국이 역사를 통해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 벌어진 사실을 똑똑하게 알아야 합니다.
단국조선의 대륙 삼한(전한, 번한, 마한)관경계 -> 단국조선은 3왕조 제1왕조 -> 제2왕조 -> 제3왕조(대부여) 삼조선체제(진조선, 번조선, 막조선) 병권분립으로 바꾸어짐 47대 고열가단군 -> 6년간 5가 공화국시대 ->/단군조선 끝/->해모수 부북여 건국(고리국 출신, BC239년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사란)- 해모수가 단군조선의 대부여의 계통을 승계함 -> 고두막한 -> 고주몽(북부여를 고구려로 개칭) 고구려 건국
북부여 시기에도 삼조선이 존재했었습니다. 위만은 처음에 번조선에 망명하였고, 이후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위만이 지배한 영역은 고조선 전체가 아닌 번조선의 일부였습니다.(북부여기에 나타남) 위만이 번조선의 정권을 침탈(BC194)하고 66년 후인 BC128년에 북부여의 3세 고해사단군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남려성에서 위만정권의 도적을 격퇴하였다.
또 4세 고우루단군이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2년 뒤인 BC118년 우거왕의 군대에게 해성 이북의 50리 영토를 빼앗겼다. 그러나 몇 년 뒤 북부여군이 해성을 공격하여 탈환하고 구려하(요하) 동쪽을 모두 차지하였다. BC114년에는 위 씨 정권의 공격에 대비하여 좌원에 목책을 쌓고 남려서에 군대를 배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소위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지배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진실일 수 없습니다.
한무제의 위만정권 침입(BC109~108)
BC109년, 위만의 손자 우거 때 한무제가 좌장군 순체에게 군사 5만을 주어 육로로, 누선장군 양복에게 수군 7천을 보내 바닷길로 위만정권의 수도 왕험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한나라는 초기에 패하였으나 1년이 넘는 교전 끝에 이간책으로 위만정권 지도층을 분열시켜 결국 우거를 죽였다(BC108) 한나라는 그 여세를 몰라 북부여로 쳐들어왔으나 서압록 출신 고두막한이 거병하여 한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고두막한은 졸본에 나라를 열어(BC108)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이라 칭하였다. 이때부터 후기북부여시대를 열었으며, 고두막은 단군조선 47대 고열가의 후손이며, 북부여를 계승하여 후 북북여 시대를 열고 4세단군 고우루(해우루)의 아우 해부루를 강등시켜 동부여(가섭원 땅)의 후에 봉하였다. 고두막의 다른 이름은 두막루인데 이는 북부여라는 뜻이다.
한나라는 우여곡절 끝에 완검성을 함락시켰지만(BC108) 결코 한나라가 승리 한 싸움은 아니었다. 전쟁 후 논공행상에서 좌장군은 기시형(목을 베고 사람들에게 보이는)을 당했고, 누선장군은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평민으로 살았다. 한이 패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한 장군들이 모두 처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거왕을 죽여 위만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한 우거의 신하들을 산동지역 제후로 봉하고 후대하였다. 니계상 삼은 홰청지역 제후로, 한음은 적저의 제후로 장군왕 은 평주의 제후로 우거의 아들은 장강은 기 지역 제후로 최재상은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온양의 제후로 봉해졌다.
한사군 이야기가 나오는데 명확하지 않다. 사마천이 20대였을 때 일인데, 사마천은 한사군에 대한 정확한 명칭을 기재하지 못했다. 이후에 주석에 명칭을 제각각 붙였으며, 믿을만한 근거가 없으며 만약에 있었다 하더라도 요서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고두막한의 승리로 한나라의 침략을 저지하였다. 한사군의 설치 이야기는 중국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며, 사실을 크게 왜곡하고 있다.
북부여의 계보와 삼국의 혈통
북부여는 전체 181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전기북부여: 1세해모수-> 2세 모수리->3세고해사->4세고우루(해우루) 153년, 후기북부여: 5세 고두막-> 6세고무서 28년으로 나누어진다. 이 181년 동안 놀랍게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태동되었습니다. 그래서 북부여가 아주 중요합니다.
5세 고두막단군의 따님 파소공주는 임신하여 경주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박혁거세를 낳았습니다. 6대 고무수단군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며 딸 소서노공주가 있었습니다. 고주몽의 비범함을 알고 소서노공주와 결혼시켜 비류와 온조를 낳습니다. 그래서 고주몽은 북부여의 7대 단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주몽은 해모수의 후손으로서 나라 이름을 해모수의 고향인 고구려(실제로는 고리, 고구리라 불렸으나 후세에 고구려라 불리게 됨)를 기리며 국호를 고구려 하고 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 고주몽은 동부여에 있을 때 예씨부인과의 사이에서 유리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와 고구려를 물려받게 되고, 이에 소서노와 비류는 이주하여 소서노왕국을 세우게 되고, 비류가 물려받게 됩니다. 온조는 미추홀에 와서 이후 한성백제를 건국하게 됩니다.
<한국사에서 사용된 8개의 부여>
조선의 초대단군의 4남 이름이 1)부여이며, 보여는 군사를 잘 다루었으며, 강력한 군사력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부여가 다스리는 지역(백악산(지금의 길림성 장춘)을 부여라고 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제3왕조(44세 단군)-BC 425~2328)-장단경에서 사용한 2)대부여 -> 해모수단군이 건국한 3)북부여 -> 고두막한이 이어받은 후기 북부여인 4)졸본부여 -> 고두막한에 의해 물러난 전기 북부여의 4세단군의 아우 해부루가 후로 격하되어 이주한 5)동부여(가섭원부여) -> 동부여 멸망 후 4세 대소의 아우가 세운 6)갈사부여(갈사국)-이후 고구려에 복속 후 동부여 후 제수받음 -> 동부여가 고구려로 복속 후 동부여 대소의 종제에게 7)연나부부여(서쪽에 있어 고구려에서는 서부여라 불렀으나, 연나부부여에서는 서부여라 칭하지 않았음)의 후에 봉합니다. 이후 백제의 25세 성왕 때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했을 때 부여 계승의식에 따라 국호를 8)남부여라 칭하였습니다.
이처럼 부여는 강력한 군사력을 상징하였기에 나라가 약해졌을 때 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중국의 사서와 역사에서 등장하는 부여는 이 서부여(연나부부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국사에서 배웠던 부여는 중국의 후한서에 기초하여 이 서부여에 대한 기록만 배웠습니다. 올바른 역사를 잃어버려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일본에 진출한 부여족>
또한 연나부부여(서부여)는 모용씨에게 패하는데, 연나부부여(서부여)의 왕 의려(또는 그의 아들 의라)가 바다를 건너가 오진(응신-삼신이 감응하여 태어난 왕)의 왕이 되고, 이후에 일본 최초의 통일왕조인 "야마토(대화)왜"를 건국하였다.
1) 기다 사다기치(1871~1939)는 일본 왕실의 조상이 부여, 백제계라고 주장하고 부여는 4세기에 일본에 건너와 나라를 세웠다고 함. 일본의 기마민족설을 최초로 주장
2)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2002)는 동북 부여계의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열도에 들어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야마토(대화)지방에 야마토조정을 세웠다는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주장
3)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음식을 먹을 때는 모두 조두(목기 그릇)를 사용하고 여럿이 모이는 때에는 서로 절하면서 잔을 권하는데 잔을 씻어 권한다."라고 했고 또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전할 때는 모두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대고 조용히 말을 한다."라 하였다. 부여인과 일본인의 강한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신용하의 부여족과 불가리아)에 대한 이야기>
두막루(서기410?~726)부여의 유민이 나하(제1송화강)를 건너가 건국한 나라 대막루, 대막로, 달말루라고도 부른다. 위치는 흑룡강성 눈강 동쪽, 송화강 북쪽, 송눈평원의 동부, 송요평원의 북쪽 지역으로 하얼빈, 치치하얼 근처이다. 726년 대진국 무왕과 흑수말갈에 멸망. 위서 열전 두막루 조를 보면 "옛날의 북부여"라고 했고 신당서 유귀전에서 "스스로 북부여의 후예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1) 4세기 말경 부여족의 일파가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와 흑해사이에 위치한 "갑카스(코카서스)" 지방으로 이주. 그 후 5~7세기 초까지 돈강유역과 북갑카스 지역으로 계속 이주.
2) 서양에서 7세기부터 불가(Bulghar)족의 역사가 나오는데 이 불가족이 부여족이다. 불가는 부여(불)의 가라는 뜻이다.
3) 635년 불가족은 족장 쿠브라트의 지도 아래 대불가리아 건국.
4) 642년 쿠브라트 사망 후 그의 다석 아들의 권력싸움으로 불가리아 해체.
5) 둘째 아들 코라그가 세운 "고추불가국"은 14세기까지 번성. 현재 러시아의 타타르 자치공화국으로 존재.
6)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가 이끈 불가족은 발칸반도로 남하. 당시 불가족은 동로마군과 결전을 앞두고 비토새산(발칸산)에서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을 행하였다고 함.
7) 이 때 로마군을 물리치고 불가리아 제1제국(686~1018)건국.
8) 불가족은 귀족이 되어 보야(부여의 변음)라 불렸고, 크롬(Krum)황제때 수도를 옮겨 소비(지금의 소피아)라 불렀다.
9) 황제는 소비의 산에 올라 단군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산 이름을 발칸으로 정하였다.
10) 신용하는 "발칸 산"을 "밝안산". "밝산", "백산" 등 우리말 지명과 동일한 것으로 봄. 한 민족은 고대부터 백산(밝은산)에서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이발칸산에서 발칸반도라는 이름이 유래.
11) 크롬황제가 병사한(814) 후 국력약화. 12세기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 세움.
12) 불가리아인은 서양에서 유일하게 갓난아기의 엉덩이에 반점(몽고반점)이 있다.
북부여 이후의 국통맥
<고구려> 건국(BC58~CE 668) 이후 역사가 726년이지만 중국의 사서에서는 북북여도 고구려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해모수의 고향이 고구려(고리, 고구리) 였으며, 고주몽이 해모수를 승계하였으므로 북부여는 원시 고구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북부여를 포함한 고구려는 907년(BC239~CE668) 입니다.
<대진국> CE 698~926년입니다.
대중상이 동모산에 이르러 후고구려 건국 669년, 이후 대조영이 대진국 699년 건국-진한의 계승의식(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국왕으로 책봉-중국의 자시 중심적 자기들만의 칭호) 이때부터 말갈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발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인안 16년(단기 3067, 734)에 구다, 개마, 흑수 등 여러 나라가 나라를 바쳐 항복하므로 취하여 성읍으로 삼으셨다. 이듬해 송막에 12성을 쌓고 또 요서에 상을 쌓으시어 ㄱ드디어 5경 60주 1군 38현을 두셨다. 강역이 9천리나 되었으며, 당과 왜, 신라, 거란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니 천하가 모두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멸망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전하는 내용이 없으며 거란의 침입, 내부분열, 백두산폭발 등의 패망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고려>
초기에는 황제라 칭했으며, 황제로 원구단을 설치하여 제천의식 거행하였음. 25대 충렬왕 이후 원나라의 간섭으로 제후국으로 전락
<유교 조선>
유교에 찌들어 몰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고종말기에 임제건원을 하며 원구단에서 황제로 등극 우리나라는 삼한의 땅이니 대한제국 선포
<대한제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국호를 채택
<대한민국과 북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