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고구마를 굽습니다.

겨울하면 따뜻해지는 간식이야기

by 핑크뚱

요 며칠 춥다, 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습니다.

외출했다 막 돌아왔습니다.

집을 비운 4시간가량. 그 사이 우리 집에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차에서 먼저 내려 집으로 달려간 아무거나 군이 요란하게 나를 부릅니다.

“엄마, 엄마, 집에 난리가 났어요.”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사태 파악이 바로 됩니다.

화단에 있는 바깥 수도관이 터졌습니다.

화단으로 수돗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습니다.

날씨도 끄무레한데 내 기분까지 순식간에 얼어붙습니다.

어린 나는 겨울이 싫었습니다.

갈라진 튼 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강한 찬바람이 스칠 때마다 따끔해 눈물이 났습니다.

이런 날은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만화책을 보며 언 볼을 녹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어디 그랬나요.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암소 2마리를 길렀습니다.

봄, 여름, 가을에는 건초를 먹였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사람이 따뜻한 음식이나 구들방을 찾듯 소도 따뜻한 음식을 좋아했나 봅니다.

다른 계절에 먹던 건초에 물을 넣어 푹 끓여 만든 소여물을 먹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유일한 우리 집 난방을 위해 소여물을 끓인 것이었습니다.

겨울이면 삼 남매는 하루씩 돌아가며 숙제같이 소여물을 끓여야 했습니다.

친구들과 신나는 놀이에 푹 빠져 있을 때도 당번 날이 되면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나를 억지로 떼어 놓는 듯해 소여물 끓이기는 무척이나 싫었습니다.

여자인 나도 이러니 남자인 오빠와 동생은 오죽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소여물 끓이는 것을 자주 잊었습니다.

남자 형제들이 잊은 소여물 끓이기는 억지로 떠밀려 내게로 넘어왔습니다.

그렇게 넘어온 숙제는 싫다는 소리 못하는 내가 자연스럽게 매일 떠안았습니다.

소여물을 끓일 때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미리 잘게 잘라 놓은 건초와 충분한 물입니다.

건초더미는 수시로 아버지가 마련해 놓았고 저는 물만 준비하면 됐습니다.
물은 꽁꽁 언 집 앞 냇가에서 얼음을 깨고 길어 와야 했습니다.

어린 제가 하기에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튼 볼은 아리었고, 꽁꽁 언 손은 마치 너무 빨갛게 익은 홍시 같아 터질까 아슬아슬했습니다.

살을 에는 추운 겨울날 난방과 소여물 끓이기는 한 시간가량 어린 노동력을 투자하면 대가로 밤새 온 가족은 지글지글 끓는 구들장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러다 가끔 가을에 수확한 고구마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작은 방 아랫목에 상자째로 놓여 있는 고구마는 다음 해 씨고구마가 될 귀한 존재였습니다.

어린 시절 늘 부족한 먹거리는 부모님 몰래 하나, 둘 씨고구마를 꺼내 먹게 했습니다.

처음엔 상자 뚜껑을 닫기도 힘들었던 고구마가 점점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날로 낮아지는 고구마 상자를 볼 때마다 엄마에게 혼날 게 두려웠지만 멈출 수 없었습니다.

소여물을 끓이는 아궁이에서는 장작더미가 활활 타다 불의 기세가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은은한 숯불이 뜨겁게 달궈진 내 볼을 천천히 식혀줍니다.

그때 아랫목의 고구마를 몰래 가져와 숯불에 묻어 놓습니다.

끓인 소여물을 소들에게 먹이고 나면 그날 내가 해야 할 일은 끝이 났습니다.

밭일 끝낸 엄마는 부엌에서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이며 저녁상을 차리고 있습니다.

나는 살금살금 불 앞으로 갑니다. 달큼한 냄새가 먼저 내 오장육부를 건드렸습니다.

숯불에 묻어 둔 껍질이 새까맣게 탄 고구마를 꺼냅니다.

내 작은 양손에 고구마를 올려 오른쪽, 왼쪽 시소를 몇 번 태워 식혀줍니다.

입에 숯 검댕이 묻는지도 모르고 뜨거움을 날리기 위해 ‘호호’ 바람을 불어가며 벗겨낸 군고구마가 샛노란 먹스러운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마침내 깊고 깊은 내 입속으로 잠수만 하면 됐습니다.

잠수가 시작될 찰나 그제야 꽁꽁 언 얼굴을 들이밀며 집에 돌아온 오빠와 남동생입니다.

그들은 어슬렁어슬렁 먹이 찾는 배고픈 하이에나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와 섰습니다.


마녀가 마술을 부렸을까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을까요? 내 손에 들려 있었고, 내 입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군고구마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내 입 앞에서 재바르게 낚아챈 오빠와 남동생이 자신들 입속에 넣었습니다.

내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 가득 품고 그들을 째려보았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울며불며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구요. 당연히 부모님 몰래 꺼낸 고구마이니 들키면 엄마에게 겨울바람보다 더 매서운 등짝 스매싱을 맞을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군고구마는 일탈이었으며, 아슬아슬 전율을 주는 음식이었습니다.

부모님 눈 밖에 나는 행동은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먹을 게 항상 부족했던 그 시절 졸보인 나에게 불끈 용기를 불어넣어 준 고구마입니다.

부모님 몰래 구워 먹어 더 달큼했던 맛이 오늘 유달리 입속을 휘졌습니다.

수도관은 강추위에 동파했고, 날은 점점 더 추워지는 저녁입니다.

창고에 있는 고구마를 꺼냈습니다.

어린 시절 먹었던 군고구마의 달큼함이 우울한 이 시간을 견디게 해 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나는 고구마를 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