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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능가하는 운명이란 없다 - <시지프 신화>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343번.

by 이태연





시시포스(시지프) 신화를 이야기로 풀어낸 철학 에세이입니다. 카뮈는 신의 저주에 의해 영원히 산 밑에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시지프의 운명을, 부조리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의 삶에 빗대어 그려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은 자살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이어 나가는 것'임을 강조해줍니다. 알베르 까뮈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어떤 체계를 믿을 만큼 충분히 이성을 믿지 않는다······ 나의 관심사는 모럴이다." 라고 언급합니다.



<< 카뮈의 시선 >> - 의식은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일상적 행위들이 정지되는 시간, 즉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오는' 순간, 숨을 고르는 순간에 찾아온다. 이 돌연한 방향 전환은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반성'의 은유가 된다. 반성에 의해 인간은 그의 운명보다 강해진다.


*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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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책의 첫 페이지에는 이미 그 마지막 페이지의 암시가 담겨 있는 법이다. 이와 같이 처음과 끝의 관련은 불가피하다.


* 모든 위대한 행동, 모든 위대한 사상은 그 시작이 하찮다. 위대한 작품은 흔히 어느 길모퉁이를 돌다가 혹은 어느 식당의 회전문을 지나가다가 착상한 것이다. 부조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부조리한 세계는 그 무엇보다도 이런 보잘것없는 탄생에서 고귀함을 이끌어 낸다.


*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말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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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하루 이어지는 광채 없는 삶에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 모든 사람이 마치 죽음 같은 것은 '전혀 몰랐다' 는 듯이 살고 있는 것은 정녕 놀라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 그 까닭은, 사실 죽음의 체험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실제로 경험하고 또 의식한 것만이 체험인 것이다. 이 경우, 기껏해야 타인의 죽음에 대해 경험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타인의 죽음이란 하나의 대용품이요, 정신의 관점일 뿐이므로 결코 충분할 만큼 우리를 설득하지 못한다. 이 우울한 관례는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 시간이 우리에게 공포를 주는 것은 시간이 증명을 하기 때문이며 해답은 그 뒤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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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 자신에게 영원히 이방인일 것이다. 심리학에 있어서든 논리학에 있어서든, 여러 가지 진리는 있으나 유일한 진리는 없다. "너 자신을 알라." 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에는 고해성사 때 하는 "덕을 행하라." 라는 말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 생각한다는 것은 보는 방법,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일이며, 자신의 의식을 인도하여 생각 하나하나, 영상 하나하나를 프루스트처럼 특권적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 이해의 측면에서, 부조리는 인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이와 같은 은유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세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양자가 함께 있는 가운데 있을 뿐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부조리야말로 양자를 묶어 주는 유일한 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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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히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명백한 사실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인간은 항상 자신의 진리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일단 그 진리를 인정하고 나면 그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부조리를 의식하게 된 인간은 영원히 그것에 매인다.


* 이 정신과 이 세계는 서로 부둥켜안지 못한 채 서로 힘을 겨루듯이 떠밀며 버티고 있다. 나는 이 상태에서의 삶의 규범을 묻는다.


* 세상에 불변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여러 가지 진리들이 존재할 뿐이라는 원초적 주장에 있어서 현상학은 부조리의 사상과 일치한다. (···) 의식은 대상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대상을 주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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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을 벗어난다. 부조리는 사형수의 마지막 생각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현기증 나는 추락의 막다른 벼랑 끝에서 어쩔 수 없어 바라보게 되는 저 한 가닥의 구두끈이다.


* 부조리를 만나기 전의 일상적 인간은 여러 가지 목적이나 미래가 정당화에 대한 관심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자기의 운수를 가늠해 보며 장래에 대해, 정년퇴직 후 또는 자식들이 하는 일에 대해 기대를 건다. 아직도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뜻대로 이끌어 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실제로 그는 마치 자기가 자유로운 존재이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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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조리의 인간은 (···) 자기 인생에 어떤 목표를 상정함으로써 그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의 요청에 순응했고 그리하여 자신의 자유의 노예가 되었다.


* 한 인간의 모럴과 가치의 척도는 그가 축적할 수 있었던 경험의 양과 다양성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다.


* 같은 햇수를 사는 두 사람에게 세계는 항상 같은 양의 경험을 제공한다. 이를 의식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 광기와 죽음은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몫이다.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부조리와 부조리가 내포하는 덤으로서의 삶은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의지의 반대인 죽음에 달려 있다. 뜻을 잘 헤아리며 해야 할 말이지만 이것은 오로지 운의 문제인 것이다. 운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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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영역은 시간이다." 라고 괴테는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말이다. 부조리한 인간이란 실제로 어떤 인간인가? 영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영원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다.


*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만사가 너무나도 간단하리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부조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 파우스트는 현세의 쾌락을 요구했다. 그 불쌍한 사람이 그냥 손을 내뻗기만 하면 거기 있는 것인데, 자신의 영혼을 기쁘게 해 줄 줄 모른다는 것은 이미 그 영혼을 팔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와 반대로 돈 후안은 흡족할 정도의 쾌락을 맛보라고 영혼에게 명한다. (···) 이승의 삶이 그에게는 흡족하다. 그 삶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불행한 일은 없다. 이 광인은 위대한 현자다.


* 한 인간은 그가 말하는 것들에 의해서보다 침묵하는 것들에 의해서 한결 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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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인간 자신의 목적이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목적이다. 그가 무엇인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삶 속에서다.


* 인간이 이해와 사랑을 위하여 창안해 낸 여러 가지 분야 사이에 경계선이란 없다. 그 분야들은 상호 침투하며 동일한 고뇌에 사로잡혀 있어서 서로 분간하기가 어려워진다.


*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 창조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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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그런데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떨어지곤 했다. 신들은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이유 있는 생각이었다.


* 시지프의 신화에서는 다만 거대한 돌을 들어 산비탈로 굴려 올리기를 수백 번이나 되풀이하느라고 잔뜩 긴장해 있는 육체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의 온통 인간적인 확실성이 보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측량할 수 있을 이 기나긴 노력 끝에 목표는 달성된다. 그때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상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 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그날을 똑같은 작업을 하며 사는데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만 비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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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지프의 소리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 부조리한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며 그의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어도 인간을 능가하는 운명이란 없다. 혹 있다 면 오직 그가 숙명적이기에 경멸해야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단 한 가지 운명이 있을 뿐이다.


* 보기를 원하는 장님 그리고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떨어진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에 남겨 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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