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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Sep 11. 2024

아름다운 감정으로 사람은 나쁜 문학을 만든다 -<만년>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382번.










 「만년」이라는 제목과 달리 열다섯 편의 단편 중  「만년」이라는 작품은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나는 완성된 작품을 큼직한 종이봉투에 서너 편씩 채워 갔다.  차츰 작품 수도 늘었다.  나는 그 종이봉투에 붓으로 '만년'이라 썼다.  그 일련의 유서에 붙인 제목인 셈이었다.  이제,  이걸로,  끝이라는 의미였다."  라고 도쿄팔경에서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 잎 】 - 특별한 스토리는 없으나 배열된 단편적인 문장들이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입니다.

  *  죽을 생각이었다.  올해 설날, 옷감을 한 필 받았다.  새해 선물이다.  천은 삼베였다.  회색 줄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여름에 입는 옷이리라.  여름까지 살아 있자고 생각했다. 

  *  형은 말했다.   "소설을 시시하다고 생각지 않아.  내겐 그저 좀 미적지근할 뿐이야.  단 한 줄의 진실을 말하려고 100페이지의 분위기를 꾸미거든."  나는 어렵사리 거듭 깊이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정말이지 말은 짧을수록 좋아.  그것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다면."  

  *  "사회 진보에 마이너스 역할을 하는 녀석들은 전부 죽는 게 나아."    (···)고바야카와는 아오이가  하는 말이 갑자기 바보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힘껏 살아 있어야 해.  그리고 그게 훌륭한 플러스의 생활이지.  죽다니 바보짓이야.  죽다니 바보짓이야."












【 어복기 】 - 스와는 용소 폭포 옆 통나무 집에서 아버지와 살고 있는 열다섯 살 소녀입니다. 아버지가 숯을 팔러 마을로 간 어느 날, 낯선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자 폭포에 뛰어들게 됩니다. 

  *  스와는 콸콸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폭포 모양은 결코 똑같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물보라가 튀어오르는 모양이건 폭포의 너비건 눈이 어질어질하게 바뀌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침내 폭포는 물이 아니야,  구름이야,  이것도 알았다.  폭포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하얗게 뭉게뭉게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아 그렇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물이 이토록 하얘질 리가 없지, 라고 생각했다.

  *  "바보!"  스와는 짧게 외쳤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발밑에서 폭포 소리가 났다.  미친 듯 울부짖는 겨울 숲 좁은 틈새로,  "아부지!"  낮게 부르고 뛰어들었다.  정신을 차리자 주위는 어스레하다.  폭포의 굉음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줄곧 머리 위에서 그걸 느꼈다.  몸이 그 울림에 따라 한들한들 움직이고, 온몸이 뼛속까지 차가웠다.  아하!  물속이구나!  알고 나니, 한없이 마구 상쾌해졌다.  후련했다.  (···)몸을 비틀면서 똑바로 용소를 향했다.  순식간에 빙글빙글 나뭇잎처럼 빨려 들어갔다. 












【 어릿광대의 꽃 】 -  오바 요조는 「인간 실격」의 주인공과 이름이 동일합니다.  좌익 운동을 하다 술집 여성과 투신자살을 기도한 뒤,  혼자 살아남은 오바 요조는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  오바 요조.  (···)나는 올봄에  '나'라는 주인공으로 소설을 써 버린 탓에 두 번 계속하는 게 낯간지럽다.  내가 만약 내일이라도 덜컥 죽는다면,  저 녀석은  '나'를 주인공으로 하지 않고선 소설을 못 썼어,  하며 의기양양하게 술회하는 기묘한 남자가 나오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다. 

  *  고스게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넌 사물을 주관적으로밖에 생각할 줄 모르니까 글렀어.  무릇,  --- 무릇,  한 인간의 자살에는 본인이 의식하지 못한 뭔가 객관적인 큰 원인이 감춰져 있는 법이라더군."










  *  청년들은 언제나 진정으로 논의하지 않는다.  서로 상대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아야지 하고 최대한 조심하면서,  자신의 신경도 소중히 감싼다.  허튼 경멸을 당하고 싶지 않다.  (···)논의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타협의 눈동자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웃으며 악수하고는,  속으로 서로에게 함께 이렇게 중얼거린다. 멍청한 녀석!  

  *  그들의 논의는 서로의 사상을 교환하기보다는 그때그때의 분위기를 마음 편히 가다듬으려 이루어진다.  무엇 하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잠시 듣다 보면,  뜻밖의 수확을 얻기도 한다.  그들의 거드름 피우는 말 속에서,  때때로 깜짝 놀랄 만치 솔직한 울림이 느껴진다. 조심성 없이 내뱉는 말이야말로 진정성을 담고 있다.  

  *  아! 작가는 다들 이런 사람들일까?  고백하는 데도 말을 꾸민다.   (···)이렇게 쓰면서도 나는 내 문장을 의식한다. 











 *  작가는 그 작품의 가치를 알 수 없다는 게 소설도(道)의 상식이다.  나는 분하지만 그걸 인정해야 한다.  스스로 자기 작품의 효과를 기대한 나는 바보였다.  특히 그 효과를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했다.  입 밖에 내는 순간,  또다른 영 딴판인 효과가 생긴다.  그 효과가 대개 이러하리라고 추측하는 순간,  또 새로운 효과가 튀어나온다.  나는 영원히 그걸 추적만 해야 하는 우를 범한다. 

  *  죽은 대작가는 행복하다.  오래 살아남은 어리석은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사랑받게 하려, 땀을 흘리며 빗나간 주석만을 달고 있다.  그리고 대충대충 주석투성이 성가신 졸작을 만든다.  

  *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깡그리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건 작가의 패배다.  아름다운 감정으로,  사람은 나쁜 문학을 만든다.  나는 세 번 이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승인하련다. 











【 완구 】- 작가의 심오한 정신 세계가 담겨 있는 미완성의 작품입니다. 

  *  어떻게든 된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하루하루를 맞이해 그대로 보내면서 지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어떻게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처지가 되면,  나는 실 끊어진 종이 연처럼 둥실둥실 고향 집으로 바람에 날려 돌아온다. 

  *  나는 추상적인 어투를 가능한 한,  간신히 삼가야만 한다.  어떻게도 결말이 나지 않아서다.  한마디 변명을 늘어놓기가 무섭게 연달아 자꾸자꾸 앞말을 뒤쫓아 가다,  결국은 1000만 단어의 주석.

  *  사물의 이름이란 그게 어울리는 이름이라면 굳이 묻지 않더라도 절로 알게 되는 법이다.   (···)멍하니 물상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그 물상의 언어가 내 피부를 간지럽힌다.  예를 들면,  엉겅퀴.  나쁜 이름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여러 번 들어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름도 있다.  예를 들면,  사람. 

























                                                            <페이지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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