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258번.
자신의 딸들에게 헌정하기 위해 집필된 소설로, 전통적인 역사 소설과 아동 소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품입니다. '왕자'의 모델은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입니다. 작가는 16세기 영국의 궁정과 거리의 풍경 등을 생생하게 담아내며 '외견과 실재'의 간극을 날카롭게 풍자합니다.
<< 작가의 시선 >> - 거지 소년 톰 캔티는 우연히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은 튜더 왕자의 옷을 입어 보게 됩니다. 왕자는 병사들에 의해 왕궁에서 쫒겨나게 되고, 이 둘의 뒤바뀐 삶이 시작됩니다.
* 영국 어디를 가도 귀에 들리는 말이라고는 갓 태어난 에드위드 튜더 왕세자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갓난아이, 즉 초라한 넝마 조각에 싸여 있는 톰 캔티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는 그가 태어나는 바람에 오히려 골칫거리가 생긴 거지 가족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 톰은 마음씨 착한 앤드루 신부가 들려주는 거인과 요정들이며, 난쟁이와 도깨비들이며, 마법에 걸린 성이며, 멋진 임금님과 왕자들이 나오는 옛날이야기와 전설을 마음껏 들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왕궁에서 귀여움을 받는 왕자의 멋진 생활을 마음속에 그리며 달콤한 상상에 젖다 보면 어느덧 아픔과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밤낮없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그 소망은 바로 자신의 두 눈으로 진짜 왕자를 보는 것이었다.
* 왕자의 삶에 관한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공상하다 보니 톰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점점 진짜 왕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말투와 태도가 눈에 띄게 예의 바르고 점잖아지자 친한 친구들은 크게 감탄하고 재미있어했다. (···)어른이 된 사람들도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톰한테 찾아가 해결해 달라고 했고, 그들은 그의 슬기롭고 현명한 판단에 자주 감탄을 금치 못했다.
* 톰은 누더기 옷차림으로 밖에 나가 푼돈을 구걸하고, 빵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습관처럼 얻어맞으며 욕설을 듣고 나서 손바닥만 한 더러운 밀짚 위에 몸을 쭉 뻗고 꿈속에서 다시 헛된 위엄을 부리곤 했다.
* "왕자님, 저는 단 한 번만이라도 왕자님이 입고 입고 계신 옷 같은 것을 입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나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오호, 그러고 싶으냐?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몇 분이 지난 뒤 어린 왕세자는 톰의 너덜거리는 옷을 휘감았고, 어린 '거지 세계의 왕자' 톰은 번쩍거리는 왕자의 옷으로 치장을 했다. 두 소년은 큼직한 거울 앞으로 걸어가서 나란히 섰다. 그런데 아,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전혀 서로 옷을 바꿔 입은 것 같지 않은 것이 아닌가! 두 소년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거울을 바라본 뒤 또다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 왕자는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고, 그럴수록 점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또한 몸이 너무 피곤하고 지쳐 있어 이제는 한 걸음도 더 내디딜 수 없었다.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아도 조롱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어느 누구를 더 붙잡고 물어 보지도 않았다. (···)왕자는 혼자서 다짐했다. (···)"오늘의 교훈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자. 내가 그걸 잊어버리면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거야. 배움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낳거든."
* 왕자의 사실에 홀로 남은 톰 캔티는 (···)왕자의 고상한 몸가짐을 흉내 내며 뒷걸음을 치면서도 여전히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삼십 분이 지난 뒤 갑자기 톰은 왕자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곧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 "왕자님이시다! ······왕자님이 오신다!"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허리를 굽힌 사람들 사이로 지나갈 때 톰의 마음은 점점 더 암담해지기만 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해방시켜 주지 않는 한, 이제는 정말로 꼼짝없이 붙들린 신세로 이 황금 새장 안에 갇혀 언제까지나 친구도 없이 외롭게 지내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전능하신 에드워드 왕세자님 납시오!" (···)강 위의 군중이 일제히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그러자 오늘 행사의 장본인이요 주인공인 톰 캔티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와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빛이 왕자한테 쏟아질 때마다 보석들은 눈부신 광채로 답례를 보냈다. 아, 오두막에서 태어나 런던의 빈민굴에서 자랐으며 누더기 옷과 흙먼지와 가난을 벗 삼아 살아온 톰 캔티여, 이 얼마나 꿈같이 황홀한 장면인가!
* 캔티 부인은 슬픔에 잠긴 채 자리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뒤척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 아이가 미쳤건 제정신이건 자기 아들인 톰 캔티와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데가 있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 시작했다. 뭐라고 설명하거나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워도 어머니만이 느끼고 찾아낼 수 있는 본능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 왕자는 곧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다. (···)온 런던 사람들이 자기 대신에 가짜 왕자를 위해 축제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는 거지 소년 톰 캔티가 의도적으로 엄청난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왕자 지위를 빼앗고 있다고 쉽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시청으로 가서 자신의 신분을 알리고 사기꾼을 몰아내는 것 말이다. 또 왕자는 톰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준 뒤 그의 목을 매달고 시체를 끌어내 갈기갈기 찢어 놓기로 마음먹었다.
* 왕실 금고는 이제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고, 시종 1200명은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자 또다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톰은 몹시 놀라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가면 우린 망합니다.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에요. 왕실의 규모를 줄이고 시종들도 대폭 정리해야 합니다."
*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들판에서 마음껏 공기와 햇빛을 누리며 살던 나를 왕으로 만들어 이곳에 가두고 이토록 괴로움을 안겨 주시는 걸까?" (···)톰은 왕의 집무와 관련한 일을 하는 데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하며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두고 그는 마음속으로 '낭비'라고 불렀다. 해서는 안 될 일은 왜 그렇게 많고 지켜야 할 예절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 톰 캔티가 왕위에 오른 지 사흘째 되는 날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마음속에 낀 구름이 이제 한 가지 점에서는 걷혔다. 처음보다는 불편하다는 생각이 많이 없어진 것이다. 주변 상황과 분위기에도 조금 적응이 되었다. 왕이라는 쇠사슬이 살갗을 스쳐 쓰렸지만 언제나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 세상 사람들은 헨리 8세라는 이름만 들어도 몸을 벌벌 떨었다. 그들에게 헨리 8세는 콧구멍으로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세상을 무너뜨리고 손을 한 번 들 때마다 재앙과 죽음을 불러오는 도깨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 아이한테 그 이름은 오직 즐거운 추억만을 안겨 주었고, 그 추억에서 떠오르는 얼굴에는 더없는 자애와 사랑이 넘쳐 흘렀다. 그는 아버지 헨리 8세와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를 잇달아 떠올리면서 애틋한 추억에 잠겼다.
* 왕은 잠자리를 다시 정돈하여 송아지 옆에 바짝 붙여 깔았다. 그러고 거적때기를 함께 덮었다. 그렇게 하고 몇 분이 지나자 웨스트민스터 왕궁의 폭신한 침대 못지않게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이 즐거워졌다. 삶도 전보다 유쾌해 보였다.
* "정말이지, 그분은 정이 많고 자상하신 어린 개구쟁이시기도 하거든. (···)이제는 백성을 괴롭히고 억누르던 가장 잔인무도한 법을 없애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계신다고." 이 소식을 듣자 왕은 너무 놀라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비참한 몽상에 깊이 빠진 나머지 영감이 하는 말소리가 이제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감이 말하고 있는 '어린 개구쟁이'란 궁전에서 자기 옷을 입혀 주고 헤어진 그 거지 아이일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이란 이렇게 참으로 덧없고 헛된 것이 아닌가!
* 진짜 왕이 어떤 때는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부랑자 패거리에게 희롱과 놀림을 당하며, 또 어떤 때는 거지들과 살인자들과 함께 감옥에 갇히고, 또 모든 사람들한테 바보와 사기꾼 취급을 당하면서 방방곡곡을 떠도는 동안, 가짜 왕 톰 캔티는 이와는 아주 다른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한테서 이제 공포감이 사라졌다. 불안감은 조금씩 꼬리를 감춰 버렸다. 어색한 태도도 이제 사라지고 그 대신 느긋하고 자신감 있는 행동거지가 몸에 익었다.
* 궁전에 들어온 처음 얼마 동안은 낮이고 밤이고 행방불명된 왕자 생각으로 고통스러웠고, 왕자가 하루빨리 돌아와 타고난 권리와 영광을 되찾기를 진심으로 바라 마지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왕자가 나타나지 않자 톰의 마음은 새로 맛보게 되는 황홀한 경험에 점점 희미하게 사라지다시피 했다.
* "이 모든 장관과 이 모든 경이가 오직 나를 환영하기 위한 것이구나." (···)가짜 왕은 흥분하여 두 뺨이 상기되었고 눈에서는 광채가 났다. 온갖 감각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로 부풀어 올랐다. 바로 그때 동전을 뿌리기 위해 또다시 한 손을 쳐드는 순간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의 두 번째 줄에서 놀라움에 질린 파리한 얼굴 하나가 목을 길게 빼고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톰은 갑자기 역겨워지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어머니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 여자는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오더니 수비병들을 밀어내고 톰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톰의 다리를 부둥켜안더니 다리에 계속 입을 맞추면서 울부짖었다. "아, 내 새끼, 내 귀여운 새끼!" 그러면서 그녀는 기쁨과 사랑의 감정으로 가득 찬 얼굴을 들어 톰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당신을 모르오, 부인!" (···)인파에 휩쓸려 시야에서 사라지는 동안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는 그녀는 너무 상처 받고 가슴이 찢긴 듯 보였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톰은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러자 자부심은 잿더미로 바뀌었고 훔쳐서 얻은 왕의 자리도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호화로운 옷과 장식이 갑자기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썩은 넝마 조각처럼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 아이는 땟국에 전 초라한 몰골과는 어울리지 않게 엄숙한 태도로 한 손을 들면서 이런 경고의 말을 던졌다. "왕의 자격을 박탈당한 그자의 머리에 영국의 왕관을 얹는 것을 금하노라. 왕은 바로 나란 말이다." 그 순간 분개한 사람 몇 명이 손으로 그 아이를 잡았다. 그러나 그와 똑같은 순간 왕 옷을 입은 톰 캔티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낭랑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 손을 놓아라! 그분은 왕이시다!"
* "이 아이는 잠시나마 왕으로 있었으니 그에 걸맞은 특권을 누려야 할 것이오. 그래서 앞으로 이 아이는 지금 입고 있는 예복을 입게 될 것이요." (···)자부심과 행복감에 젖은 톰 캔티는 일어나서 왕의 손에 입을 맞추고 물러갔다.
* 어떤 고위 관리가 왕의 관대한 정책에 여러 번 반기를 들며, 지금 왕이 온 힘을 다해 고치려고 하는 어떤 법이 너무 너그러워서 막상 고통이나 고난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한테 그런 것을 주지 못한다고 주장하자, 왕은 애틋하면서도 동정 어린 눈길로 그 신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통 받고 고난을 당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은 아시오? 짐도 백성도 알고 있지만, 경은 잘 모를 것이오." 그 무렵은 잔인한 시대였지만 에드워드 6세가 다스리던 기간은 특별히 자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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