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423번.
이 작품에 등장하는 편지들은 블랙박스 속에 저장된 지난날의 기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블랙박스가 비행기의 속도, 고도, 조종사들의 대화 등을 기록해서 남기는 것처럼, 주인공들은 각자 자신들의 생활이 담긴 편지로 독자에게 다가옵니다. 아모스 오즈의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느낌을 주는 소설입니다.
< 일라나의 편지 > - 솔직한 성격으로 보아즈의 엄마입니다. 폭력사건으로 인한 아들 보아즈의 보석금을 위해, 7년 전 이혼한 알렉스에게 과거의 인연을 상기시키는 애증 섞인 편지를 보냅니다.
* 비행기 모형을 만들던 아이, 훈육을 잘 받고, 겁쟁이에 가까울 정도로 조심스럽던 아이. 그때 이미, 겨우 여덟 살의 나이에도, 절제된 침묵의 힘으로 모욕을 이겨 낼 줄 알았지. 그 후, 보아즈는 (···)불만이 많고 행동이 거친데, 미움과 외로움을 먹고 힘이 엄청나게 세진 것 같아.
* 당신 때문에 너무 슬퍼, 알렉. 우리 인연이 아주 끔찍하고 무서워. 죄인은 바로 난데 당신과 당신 아들이 가장 잔인하게 벌을 받고 있으니.
* 당신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어떤 남자나 여자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한 번이라도 짓게 해 본 적 있어? 누군가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준 적은? 수표와 전화뿐이지. (···)내가 당신에게 편지 두 통을 쓰게 된 진짜 이유는 나 자신을 당신 손에 맡기고 싶어서였어. 정말 모르겠어?
* 불행한 사람들은 대부분 틀에 박혀 정해진 고통에 빠져 있어. (···)그렇지만 행복은 중국 화병처럼 희귀하고 섬세한 그릇이야. 소수의 사람들이 얻는 것으로, 몇 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파내거나 조각했고, 사람마다 각자 자기 모양과 형상대로, 각자 자기 기준에 따라 만들어서, 다른 행복과 닮은 행복은 하나도 없어. 그리고 사람들은 행복을 주조할 때 자신들의 고통과 굴욕도 함께 녹여 넣는 거야. 마치 납에서 금을 정제해 내듯이. 이 세상에는 행복이라는 게 있어, 알렉. (···)행복은 인정을 받은 것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명성과 출세와 정복과 권력이 아니라, 굴복과 종속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지는 기쁨이야. 나와 타인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거야.
* 당신이 정말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을까? 나를? 혹은 당신 아들을? 거짓말이야, 알렉. 당신은 한 번도 사랑을 한 적이 없어. (···)내가 왜 당신에게 이런 잊힌 옛 추억들에 대해 썼을까? 아주 오래된 흉터를 긁으려고? 쓸데없이 우리 상처를 들쑤시려고? 블랙박스를 해독하려고? 다신 한번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들려고? 당신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려고?
* 세상에는 행복이라는 게 있어, 알렉. 그리고 고통은 행복의 반대가 아니고, 우리를 부르며 기다리고 있는 은색 가느다란 달빛에 젖은 그 숲의 빈터까지 우리가 엎드린 채 기어서 지나가야 할 가시밭길이야, 잊지 마.
* 당신과 내가 그 사람을 꼭 안아 줘요. 당신이 나를 원할 때는 내가 당신에게 꼭 붙어 누울 테고 그의 손가락은 우리 등을 어루만지겠지요. (···)우리 세 사람이 하나가 되는 거죠. 그럼 밖에서는 바깥 어둠 속에서 블라인드 틈새로 바람과 비, 바다, 구름, 별이 찾아올 테고 우리 세 사람을 조용히 안고 닫아 주겠죠. 그리고 아침이면 내 아들과 내 딸이 고리버들 바구니를 들고 나가서 정원에서 무를 캘 거예요. 슬퍼하지 말아요.
< 미카엘 앙리의 편지 > - 일라나의 새 남편으로 알렉스에게 우파 단체 기부금을 요구합니다
* 힘이란 극복하는 데 쓰라고 있는 거야. 미련한 당나귀 같은 놈아! 본능을 통제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거세게 몰아치는 인생의 비바람을 전부 그대로 당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묵묵히 그러나 단호한 걸음으로 가기로 결정했던 길, 즉 올바른 자의 길을 따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게 바로 힘이라는 거다. 다른 사람의 머리를 박살 내는 짓, 그건 아무 널빤지나 돌도 충분히 할 수 있어.
* 유대인은, 보아즈, 당하면서 받아들이고 극복하고 계속해서 우리만의 오랜 길을 걸을 줄 아는 사람이야.
* 보아즈, (···)영혼 깊은 곳에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태어났다고 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모두 이것을 알고 있다. 우리를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을 때부터 말이지.
< 알렉스 기드온의 편지 or 메모 > - 경제적으로 풍족한 보아즈의 친아빠로 명성높은 학자입니다. 사무적인 문어체로 답장을 하지만, 전부인과 아들의 동태를 살피며 수시로 돈을 보내줍니다.
* 왜 갑자기 칠 년이 지난 우리 무덤을 소란스럽게 만들려 하오? 그만 내버려 두시오. 나는 그저 혼자 조용히 살고 싶을 따름이오. (···)우리는 끝났어, 일라나. 외통수야. 마치 비행기 추락 사고가 일어난 후처럼, 우리는 마주 앉아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블랙박스의 내용을 분석했어.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이혼 선고문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야.
* 자유롭게 그리고 자신 있게 살아라.
* 현재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 부정을 가리기 위한 가면이다. (···)현재는 영원이란 종이 위에 있는 얼룩이고 혼미한 사건이다. 과거의 후광과 미래의 후광 사이게 생긴 균열을 없애고 이 두 후광이 종말론적 합일에 이를 수 있도록 하려면 이것을 현실로부터 그리고 기억으로부터 지워야 한다.
* 자존감, 즉 자기 존재에 대한 정당성과 자기 인생의 본질적인 의미를 잃으면 잃을수록 자신의 종교, 민족, 인종, 신념이나,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집단 활동의 정당성은 동일한 정도로 상승하고 확장되고 미화되고 신성해진다.
* 인간은 흥미를 느끼고 자아 정체성이 있는 한 자기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면 인생의 공허함이 두려워 열정적으로 타인들의 일에 간여하기 시작한다. (···)살인 행위와 자기희생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 우리는 사실 우리 안에 있는 '고귀한 동경' 때문에 우리 자신을 몰살시키고 있소. 종교라는 질병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불타는 욕구 때문에. (···)'목숨보다 숭고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이런저런 속임수들 같은 거요.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보기에 목숨보다 숭고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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