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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Jun 04. 2022

A137-35를 찾아서

숫자, 돼지란 단어들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A137-35를 찾아 헤맨다. 이 방 저 방 구석구석 빠짐없이 살펴본다. 눈이 뻑뻑해진다.  검색기록이 없다는 글귀만 튀어나온다. 도대체 A137-35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딱히 할 것도 없어요~” '꿀 알바'라는 아들놈의 말에 덜컥 약속을 하고 말았다. 외국으로 가게 된 아들의 뒤를 이어 일주일에 한 번 돼지농장으로 출근해 자료들을 컴퓨터에 입력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내가 숫자 울렁증이 있고. 돼지고기도 못 먹을 정도로 돼지냄새를 싫어하며, 복잡한 출퇴근시간은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온다는 거였다. 그래도 약속을 번복할 수 없어, 왕복 6시간이 넘는 경기도의 3천 평 돼지농장에서 전산관리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나마 출근이 일주일에 한번뿐이고, 사무실이 농장과 1km정도 떨어져 있으며, 농장으로 가는 시골 풍경들이 환상적이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들은 분명 슬슬 해도 될 정도로 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전혀 생소한 것을 해 내야한다는 부담감과 긴장감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익숙지 않았던 것들을 접하며 일시적인 변비와 월요병도 생겼다. 카스피린, 그린콕스, 페리에이드, 안티VS-2…. 등 수많은 동물약품과 사료, 돼지관련 단어들도, 억 단위 숫자들도, 정확한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만 되는 출퇴근도 모두 생소하고 버거웠다. 게다가 축산전문 프로그램에 만여 마리나 되는 돼지들을 교배, 임신, 분만 기간으로 분류해 고유번호로 입력해야 되는 일 또한 복잡했다.      


  사라진 A137-35는 새끼를 네 번 낳은 어른 돼지였다. 임신이 가능할 정도로 자랐을 무렵 귀에 ‘A137-35’표가 붙여진 후부터 A137-35가 이름이 되었다. 이 번호는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고유 번호였다. 어른이 된 암퇘지에게 현장직원들이 무작위로 번호를 적어서 매달아 주면 그 번호가 그대로 이름이 되는 거였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버젓이 살아 있는 돼지가 컴퓨터상에는 없다는 게 이상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수기로 작성된 분만일지에는 네 번이나 새끼를 낳았다고 쓰여 있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건지 답답했다. A135-35 때문에 일이 자꾸 지체 되어 결국 그것만 따로 빼놓은 상태로 업무를 해나갔다.   

    

  한 달여 쯤 지나자 낯설고 불편했던 ‘숫자’, ‘돼지’, ‘출퇴근’이란 단어들이 차츰 편안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돼지들을 웹상의 집에 재배치시켜 나가는 일도 처음보다 제법 익숙해졌다. 바람을 타고 솔솔 풍겨오는 돼지 냄새도, 억 단위 숫자들도, 숨이 턱턱 막히는 출퇴근 전철도 이젠 전혀 낯설지 않았다. 익숙해진 거였다. 익숙해졌다는 것, 그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란 의미였다. 생소했던 것들이 시간과 습관으로 친숙해져 어느덧 푹신한 거실소파처럼 편하고 익숙해진 것이다.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거리, 익숙한 책. 익숙한 옷, 익숙한 음식, 익숙한 집안 살림들, 익숙한 소리, 익숙한 냄새….     


  문득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그냥저냥 익숙한 패턴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해보니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불편함과 생경함을 주는 새로운 것들 대신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익숙함에 길들여져 버린 것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올해 들어  새롭게 시작해본 일을 적어보았다. 오이무침을 처음 만들어 본 것, 새로운 장르의 글을 한 편 완성한 것, 얼음 섞인 냉 쫄면을 먹어 본 것. 3시간 넘게 자전거를 타본 것. 새롭게 한 일이 이렇게나 없었다니 의외였다.      


   그래도 농장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한꺼번에 세 가지의 ‘새로운 것’을 접하게 된 것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익숙함의 틀 안에서 뱅뱅 맴돌며 살던 내가 ‘꿀 알바’ 덕분에 새로운 세계의 생소함과 두려움 그리고 긴장감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A137-35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현장 작업일지 속에, 컴퓨터  노란 포스트잇속에만 남아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A137-35는 나를 숫자, 돼지, 출퇴근이란 새로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놓고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내 이름이 컴퓨터 속에는 없단다. 나는 A137-35가 아니다. A137-35는 내 친구 이름이다. 친구의 번호는 컴퓨터 속에 없을 것이다. 친구는 새끼를 여덟 번이나 거뜬히 생산하고, 엊그제 커다란 짐 트럭에 실려 떠나갔다. 나는 지금 사료를 맛있게 먹고 있다. 눈알을 한껏 굴려 내 귀 끝을 확인해 본다. 직사각형 모양의 얇은 플라스틱 이름표가 튼튼하게 잘 붙어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내가 컴퓨터에 없다는 걸까? 이유가 뭘까? 사료를 다 먹어갈 무렵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유레카!!  노안이 빨리 온 아르바이트생이 8자를 3자로 본 게 분명하다. 왜냐면 내 이름은 A187-35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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