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샨은 네팔 인이다. 돼지 농장에서 4년 넘게 일한 경력자이다. 180센티쯤 되는 키에 가무잡잡한 피부, 커다란 눈, 우뚝 선 코가 서구적이다. 로샨은 카트만두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스물아홉 살 청년이다. 작곡을 공부하던 중 더 큰 세상을 꿈꾸며 친구와 함께 고국을 떠나게 됐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첫 직장은 전공과는 거리가 먼 돼지 농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못하는 게 없었다. 현장 직원이 갑자기 그만두거나 휴가 중 일 때면 교배(交配), 분만, 비육사(肥育飼) 등을 돌며 일을 척척 해냈다. “로샨~”하고 부르면, “네~”웃으며 달려와 야무지게 일처리를 해내는 예스맨이었다.
그런 로샨이 예스맨이 아닐 때가 있었다. 바로 돈에 관련되었을 때였다. 그는 근무기간이 만료되어 귀국하는 동료들의 퇴직금이나 외국인 보험, 급여 등을 십 원 단위까지 꼼꼼하게 따졌다. 게다가 동료들이 옛 직장에서 미처 챙겨 받지 못했던 것들의 일처리까지 부탁을 해오기도 했다. 그리고 갓 입사한 네팔직원들의 가이드역할도 했다. 현장 구석구석 데리고 다니며 주의사항을 설명해주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어느덧 로샨은 한국직원들과 네팔직원들 간의 아교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었다.
내가 출근하는 날이면 로샨은 점심을 먹자마자 매번 사무실로 올라왔다. 그리고 한국어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오후 근무 시작 때까지 머물다 갔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하는 나는 업무량이 많아 늘 시간에 쫒기는 편이었다. 1시간 가까이 로샨의 한국어공부를 도와 줄 여유가 없었다. . 한번은 너무 귀찮아서 돼지농장전문노래라며 “토실토실 아기돼지~”노래를 장난삼아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노래가 참 귀엽다고 “꿀꿀 꿀꿀~”흥얼대며 좋아했다. 그래도 로샨이 문자로 대화를 청해 올 때면 성심껏 응해주었다. 그는 현장에서 사용하는 대화들 이외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역시 언어에서도 하나를 가르쳐주면 백을 습득하는 총명함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런 로샨도 특히 어려워하는 게 있었다. 바로 ‘간다.’와 ‘온다.’였다. go와 come의 개념이라고 알려줬더니 금방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국어는 글로 쓸 때가 더 어렵다며 여전히 헷갈려했다.
로샨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인쇄를 부탁해오기도 했다. 보통 한 두 장이었지만 가끔 노트 한 권정도 분량일 때도 있었다. 메일로 받은 네팔 현지 곡들이거나, 직접 컴퓨터로 작곡을 한 것들이었다. 내 시선으로 봤을 때 로션의 음악성향은 독특하고, 몽환적이며 매력적이었다. 그는 쉬는 날이면 농장 주변으로 길게 뻗어있는 강둑길을 자주 걷는다고 했다. 봄이면 가득 피는 노란 꽃도, 빨갛게 타오르는 석양도, 눈 덮인 뒷산도, 찌르르 새소리도, 호이호이 돼지를 모는 동료들의 외침도, 젖을 빠는 아기돼지들의 색색대는 숨소리도 모두 음악이 된다고 말했다. 음악 이야기를 하는 로샨은 꿈의 나라를 여행 중인 것만 같았다.
밀린 업무에 짜증날 때도 많았고, 악보를 인쇄하느라 잉크가 떨어져서 중요한 팩스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럴 때마다 “쉬는 날 시내에 가서 인쇄해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그러나 로샨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인쇄한 악보를 받아든 로샨이 “고마워~”라며 환하게 웃을 때면 뿌듯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괜히 나도 컴퓨터를 켜 쓰다가 던져둔 글들을 꺼내 보곤 했다.
로샨의 출국 이틀 전날은 마침 내가 출근하는 날이었다. 그날은 창문이 덜컹댈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이었다. 바람 때문에 체감 온도도 훨씬 더 낮았다. 축산과 감사 자료준비에 정신없는데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샨 발소리가 분명했다. 출국 직전까지 또 귀찮게 하는구나 짜증이 확 밀려왔다. 인쇄된 비행기티켓을 건네고 바쁜 척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티켓을 받아들며 로샨이 넋두리를 해왔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여행도 많이 못 했다고, 돈을 아껴 쓰지 않아 많이 모으지 못했다고, 한국어 공부도 더 많이 하지 못 했다고, 별로 해 놓은 것도 없는데 벌써 삼십 살이 된다고…. 이때 거래처에서 전화가 왔고, 통화가 길어지자 로샨이 아쉬운 표정으로 손 인사를 남기며 사무실을 나갔다.
바빴던 업무를 끝내자 그제야 로샨이 떠올랐다. 숙소에 들러 “그동안 열심히 잘 했어! 작곡도 많이 했고, 한국어도 많이 늘었고. 로샨 대단해”라고 격려해줘야겠다는 생각에 퇴근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쿵쾅대는 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로샨이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 제켰다. 차가운 바람이 훅 밀려들어왔다. 로샨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숨을 고르더니, “실짱님 고마워”라며 봉지 하나를 쓱 내밀었다. 초록색 편의점 로고가 찍힌 봉지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과자들이 담겨 있었다.
신기했다. “내가 이런 과자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묻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로샨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1층 식당 앞 쓰레기통 사진이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간식으로 먹었던 과자 봉지들이 몇 개 보였다. 내가 쓰레기를 버리는 걸 봤었던 것 같았다. 빨갛게 언 귀를 연신 문질러대며 로샨이 말했다. 자전거를 타기에는 길이 미끄러울 거 같아 걸어서 갔다 왔다고…. 편의점이 있는 면 소재지는 성인 남자 걸음으로 왕복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나를 위해 눈 쌓인 둑길, 세찬 바람 속을 걸어갔다 온 거였다. “잘 먹을게. 고마워” 간단히 인사했지만, 마음이 온전히 담긴 선물 앞에 코끝이 찡해왔다.
얼마 후 로샨에게서 카톡이 왔다 “실짱님. 한 번 놀러 가” 여전히 come과 go를 헷갈려하는 문자에 풋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눈이 하얗게 덮인 시골 둑길을 바람과 싸우며 걸어가는 로샨의 모습이 그림처럼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