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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Jul 11. 2024

DAY13. 바보 같은 선택도 최악이 아닐 수 있다.

6월 8일 토 : 로비에서 회의하기, 비 맞기, 영화 보기





오전_쇼핑, 카페 


samo coffee


주말은 공식 프로그램 일정이 없는 날이라 대체로 한가롭다. 이 날은 특히 조식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나와서 잔뜩 먹었다. 얼마나 많이 먹었냐면, 룸메친구가 기다리다 지쳐 먼저 방으로 들어갈 정도였다. 아침부터 기분이 끝내주게 좋았다. 나는 외로이 세 번째 조식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언니들이 아래로 비장하게 내려오더니만 얘기할 사안이 있다고 했다. 얼마 후, 숙소에 있는 인원들이 다 아래로 모이고 나서 이러쿵저러쿵 회의를 시작했다. 철오빠가 말을 조금 세게 해서 언니들이 약간 발끈할 뻔했는데, 그때 진오빠가 철오빠의 말에 부연설명 붙이고 입장을 전달하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이 순간 난, 진오빠와 철오빠가 천생연분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206호 오빠들도 하늘이 점지해 준 룸메임이 분명하다. 여하튼, 아침의 회의 끝에 방을 바꾸는 게 기정사실화 되었다. 나와 룸메는 어리둥절한 채로 숙소로 올라왔는데 마음은 뒤숭숭하고 비까지 내리고 입맛도 없어서 같이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우리는 도시재생팀 분이 추천해 주신 'samo coffee'로 향했다. 그 길에서 어떤 커플이 우비를 입고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 팀의 비공식 사진작가인 내 룸메친구는 그 커플을 도촬 했다. 그러고 나서 두루미인지 뭔지 엄청 큰 새가 날아가는 모습도 목격했다. 신기하고 황홀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워낙 새를 좋아하니까. 그렇게 비를 뚫고 도착한 카페의 커피맛은 나름 괜찮았다.  우린 이 카페에서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비를 맞는 게 좋다는 갈래로 빠져선 그럼 비를 맞자는 결론을 도출했다. 우비를 사기 위해 18분이나 걸어서 다이소로 갔다. 비 오는 날도 우리의 산책도 멈출 수 없었나 보다. 나와 룸메는 우산이 있었음에도 2000원을 투자해서 구름이 그려진 귀여운 흰 우비를 커플로 샀다. 



나와 룸메는 매번 이런 식이다. 숙소에서 커피집까지 걸어서 13분? 얼마 안 걸리네. 커피집에서 다이소까지 18분? 얼마 안 걸리네. 이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숙소에서 훌쩍 멀어져 있었다. 그래서 다이소에서 다시 숙소까지 장장 30분이 넘는 시간을 우비만 입고 걸어왔다. 이 상황이 웃기면서 좋았다. 이상한 데서 짝짜꿍이 맞는 게 어이없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렇게 비를 맞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서 기분이 오묘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거 같기도 하고, 좀 자유로 운듯한 기분도 들고. 무엇보다 함께 우비를 입고 비를 맞아줄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나 혼자서는 이 정도의 기분까지 느낄 수 없었을 거 같다. 



스테이 두루 옥상



바로 우비를 벗기 아쉬워서 숙소 옥상에 올라갔다. 원래는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책이 젖을 거 같았다. 사실 이건 생각을 안 해도 당연한 사실인데. 가끔 이렇게 마음이 너무 잘 맞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바보가 돼버린다. 룸메친구는 무슨 영상으로 찍겠다며 문 앞에 핸드폰을 놔두었다. 역시 룸메친구는 MZ다. 우리 두 사람은 노래를 틀어놓고 가만히 앉아 온몸으로 비를 느꼈다. 몸에 느껴지는 빗방울의 감각과 그날의 기온과 소리까지. 그리고 산에 드리운 안개까지도 보았다. 언제나 내게 비는 거추장스럽고, 짜증 나고, 일정을 망치는 방해자일 뿐이었는데 이날은 아니었다. 비는 새로운 이벤트고, 반가운 손님이었고, 모든 일들의 바탕이 되었다. 비가 있어서 마이너스가 되는 게 아닌 플러스가 되는 날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운치 있는 나들이가 모두 끝나고 나서 어제 먹다 남은 시장음식을 다시 데우기 위해 로비로 내려갔다. 거기서 오늘 순천으로 놀러 온 환희언니 친구분들을 마주쳤다. 난 인사만 하고선 수줍어서 문 뒤에 숨어있었다. 슬쩍 본 환희언니친구들은 모두 환희언니와 비슷한 이미지였다. 내일 놀러 올 내 친구와 나도 그렇게 비슷한 이미지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오후_ 영화 관람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포스터



비가 오면 왜인지는 몰라도 영화가 생각난다.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나 보다. 숙소에 있는 인원 중 원하는 사람은 '파랑새창고'에 모여 같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댓 원스'를 보기로 했다. 각자 먹을 간식은 각자 지참하면 되는 거여서 우린 계란말이와 삶은 계란, 과자, 빵, 우유 등을 챙겨서 파랑새창고로 향했다. 원래라면 우린 더 든든히 먹었겠지만 다음날 각자의 친구들이 순천을 방문할 예정이었기에 자제했다. 그리고 이날 하동을 다녀온 다혜언니가 사다 준 맛있는 간식도 같이 먹었다. 정말 부드럽고 달콤한 오란다였다. 나와 룸메친구한테는 작은 파이도 하나씩 줬다. 진짜 맛있었다. 역시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주는 빵은 언제나 최고의 맛이다. 이날 영화는 대표님 픽이었다. 각자 편한 자리에 앉아 자유롭게 영화를 봤다. 에에올을 처음 볼 때는 엄마와의 트러블이 잦았던 때라 모녀 사이의 갈등에만 초점을 맞추어 봤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함께 본 에에올은 그때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내게 다가왔다. 상황과 환경이 바뀌었기에  영화에서 또 다른 부분에 시선이 닿았던 같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인 에블린은 아버지와 절연하고 사랑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와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삶에 불만족스러워하고 있다. 아마 아버지 대신 지금의 남편을 선택한 그 기점을 후회하고 있는 듯싶다. 그런 그녀는 어떤 계기로 인해 무수히 많은 메타버스 속 다른 선택을 해서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에블린들의 삶을 엿보게 된다. 그러면서 남편 대신 아버지를 선택하고 외적으로 가장 성공을 이룬 듯 보이는 에블린마저 본인의 인생에 불만족하며 과거의 그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에블린은 자신의 인생이 실패하고, 그래서 자신은 아무것도 못한다고 믿고 있으나 세탁소를 운영하는 이 세계 속 에블린이야말로 전 메타버스를 구할 영웅이었다. 나는 여기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나는 지금 인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그리고 짐작건대, 여기 순천에 모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듯싶다. 그래서였던 거 같다. 에블린의 후회와 망설임이 더 마음에 가까이 와닿은 것은. 나는 사소한 선택까지도 공들여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선택을 해도 언제나 내가 한 선택은 최악인 거 같았다. 언제나 나는 최악의 선택만을 하고 있는 거 같았다. 나는 그 뜸을 들여서 겨우 이따위의 선택만 해왔다는 게 가장 비참했던 거 같다. 내가 한 선택은 언제나 미련과 후회로만 점철되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만약 그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와 같은 소모적인 가정들 속에서 길을 잃었던 거 같다. 이 영화 속 세탁소를 운영하던 애블린처럼. 하지만 애블린이 그랬듯, 다른 메타버스 속 모든 애블린의 삶을 훔쳐보면서, 나는 내 선택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손이 핫도그인 세계 속 에블린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이다. 많은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세계 속 에블린은 사랑을 포기한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 최악의 선택은 어디에도 없다. 그 선택을 최악으로 만드는 나의 태도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내 공들인 선택들에게 미안하다. 이제 나의 선택들은 나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나의 동력이 될 거다. 난 이 모든 걸 영화 시작 1시간 만에 깨닫고선 너무 졸린 나머지 그 이후는 졸아 버렸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다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 날 진오빠는 자전거로 유라시아를 횡단할 때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어떤 여자분과 합석을 했다가 주머니 털릴 뻔했지만 재빠른 기지로 위험을 벗어난 에피소드였다. 그 사건 덕에 어떤 경찰분을 알게 되었고, 그게 시발점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면서 편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방금 본 영화의 애블린이 떠올랐다. 만약 진오빠가 오프숄더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분과 합석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경찰분을 만날 수 있었고, 편한 여행을 할 수 있었을까? 삶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을까? 이렇게 보면 바보 같은 선택도, 그래서 스스로를 곤경에 빠트리는 것도, 항상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내 선택을 긍정해보려 한다. 시작은 오늘의 선택들부터. 커피를 사러 나간 선택, 비 오는 날 우산을 쓰지 않기로 한 선택, 우비를 입고선 비를 맞기로 한 선택, 결국 또 숙소에서 멀어져 버렸던 산책길에서의 선택, 비 오는 저녁 다 같이 영화를 본 선택까지. 오늘 하루, 내가 한 모든 선택들이 최고라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이 아쉬운 날이 아니라 행복한 날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건 이 모든 선택들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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