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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Mar 30. 2022

토마토

    지난봄, 뒤뜰에 토마토 모종을 하였다. 땅을 갈아 모래톱 몇 봉지를 사서 채운 후 콩나물 줄기 같이 비실비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것들을 두 줄로 나란히 심고 소똥 한 봉지 사다가 쏟아부은 후 매일매일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었는지 싱싱하게 줄기를 내리고 잎사귀에도 힘이 들었다. 그 곁에 고추와 깻잎도 서너 줄 심고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쏟은 그 정성은 어느 시대 보릿고개 앞둔 소작인에 못지않았다. 채소밭, 그 크기야 큰 사이즈 신발 신은 사람 두어 발자국에 지나지 않지만, 아침에 눈만 뜨면 창밖으로 내다보고, 가서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오붓하였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포도알만 한 게 조롱조롱 달리기 시작하더니 워낙 작은 사이즈의 토마토였던지 아기 주먹만 하게 되자 더는 크지 않았다. 남편이나 나나 애초에 농사에는 무식꾼이라 몇 개 사다 심어 놓은 토마토 나무가 자라 토마토가 열렸다는 것이 그렇게 신통하고 기쁠 수가 없었다. 마치 도토리나무에서 토마토가 열린 듯 신비롭고 의기양양한 것이 마치 대 농장주가 된 듯 뿌듯하고 대견하였다. 슈퍼에 가서도 토마토를 아직은 사서 먹지만 조금 있으면 우리가 농사지은 토마토를 여름내 먹으면 되리라고, 지난해보다 높아진 가격을 흘겨보며 속으로 까짓것, 했다. 그 가느다란 줄기에 조롱조롱 매달린 채 바알갛게 익어가는 모습은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말이 나온 김에, 왜 미국에서는 토마토가 과일이 아니고 채소라고 하는지 설명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느 농장주가 채소의 기본 운송비가 과일 운송비보다 저렴한 것에 착안, 머리를 굴려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토마토는 채소다, 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래전 한국에서 살 때 우리 동네에는 한여름이면 남편이 앞에서 끄는 손수레를 그 아낙이 뒤에서 밀며 과일을 파는 부부 과일 장수가 수박과 참외를 가득 싣고 '과일 사려어!' 하고 외치면 이 집, 저 집에서 쫓아 나와 한 바구니씩 사곤 했었다. 토마토를 배추나 무와 같이 팔면서 '채소 사아려!' 하는 것은 보지도 듣지도 못 했다. 

얇게 썬 토마토를 얼음에 채우고 설탕을 듬뿍 뿌려서 한여름 오후 대청마루에 온 가족 둘러앉아 맛있게 먹던 추억은 이제는 옛날이야기일 것이다. 어디선가 들은 말로는 나이 먹은 여자를(몇 살부터인지는 잘 생각이 안 나는데) 토마토라고 부르는데 그 사연인즉슨 과일도 아닌 것이 과일인 척한다는 것이라나…. 야채들만 모아놓은 샐러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토마토이긴 하지만 그게 어디 과일이지 채소인가. 나도 나이 먹은 여자 축에 끼는(환갑이 지났으니 싫어도 하는 수 없지) 처지로서 주장한다. 뭐라 해도 토마토는 과일이다. 나는 주장한다. 


우리 채소밭에서 토마토는 귀엽게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있었는데…. 

얼마 전, 일요일 아침. 높고 푸른 하늘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고 시원하게 살랑살랑 바람까지 부는 즐거운 하루가 콧노래부터 시작되는 아침, 창문을 열고 뒤뜰의 텃밭을 보니 올망졸망 가는 가지에 매달려 바알갛게 익어가던 토마토가 밤새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제 조금 있으면 따 먹어도 되리라고 즐겁고 신나던 순간, 누가 몽땅 따 가버린 것이다. 토마토 값이 제아무리 비싸다 해도 금은보석이 아닌 이상 도둑이 들었을 리는 만무하고 누군가 자기가 먹기 위해 훔쳐 갔을 것이 분명했다. 내지르는 소리에 놀라 쫓아 나온 남편과 함께 이곳저곳 뒤져도 보고 숨어 있을 만한 장소도 물색해 보았지만, 토마토가 작정하고 나와 술래잡기를 하자는 것도 아닐 터, 찾아질 리가 만무하였다. 뒤뜰에는 다람쥐들도 많고 노루도 지나다니고 너구리들도 오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누런색 털을 가진 못생긴 토끼들도 사람 눈치 별로 안 보며 사는 듯하다. 어느 놈일까? 아무리 추적을 해 보아도 현장범을 잡지 못했으니 알 도리가 없다. 분하고 억울하여 허망하게 줄거리 끝에 잎사귀만 매달린 그 가느다란 나무만 흘겨보다가 일요일 예배 시간이 되어 교회에 가야 했는데…, 찬송가를 불러도 설교를 들으면서도 도무지 속상한 마음은 풀어지지를 않고 무언가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까짓 토마토 몇 알 가지고 이게 뭔 일이람? 속상한 데다 짜증까지 나는 것이었다. 

이따금 신문에 ‘여름 농사 망친 수해’, ‘갑자기 쏟아진 폭우가 할퀴고 간 자리, 농부의 망연자실’ 이런 머리기사를 보면서 관심도 없이 꼼꼼하게 기사는 읽어보지도 않고 넘겼었는데…. 그 절절한 농부의 절망이 가슴에 와닿는 것이었다. 다람쥐인지 노루인지 모르는 동물들이 뒤뜰의 토마토 몇 개를 훔쳐 갔다고 비탄에 잠긴 나. 교회에 가서 감사 기도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도 힘차게 부르고 와서 계속 부어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수해로 농사 망친 농부처럼 생계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 농사지은 것 배고픈 짐승들과 나눠 먹었다고 생각합시다. 우리 집 마당에서 살고 있으니 식구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아직도 농사를 망친 농부 같은 얼굴로 채소밭을 내다보는 남편에게 기세 좋게 위로랍시고 한마디하고 나니 속상하던 것이 좀 풀리는 듯싶었다. 그렇다. 마음을 곱게 먹으면 마음속이 편해지는구나. 우리는 얼마나 먹을 것이 많은가. 냉장고에 그득그득. 냉동실에는 얼어서 굴러다니는 것들도 가득한데, 뭘 그까짓 토마토 몇 개 가지고 하루를 시름에 잠겨 보내야 하는가…. 나누어 먹자. 나누는 삶. 사람의 생각 속은 초음속 비행기보다 빠르게 오간다. 그리고 안착하는 곳은 내가 편해지고 싶은 자리다. 아, 얼마나 즐거운가. 내가 먹고자 하던 것을 굶주린 누군가에게 양보한 것은…. 온갖 생각들은 갑자기 내가 천사라도 된 듯 예쁜 생각에만 잠겨 스스로도 감동한다. 그런데 그 감동은 억지로 만든 감동의 티를 내는지 순식간에 사라진다. 성경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쓰여있다. 우리는 얼마나 굉장한 존재인가…. 그리고 사람의 코에 후욱,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입김을 불어 넣으시는 순간, 실수하셔서 혹시 그 주위를 맴돌던 고약한 마귀가 슬쩍 스며들어 간 것을 모르신 것을 아닐까…. 아무리 들여다보려 해도 보이지도 않고 닿지도 않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바닥. 나는 아직 몇 개의 콩알만 한 토마토를 달고 있는 나무들을 조심스럽게 파내어 커다랗고 널찍한 화분에 옮겨 심어 부엌으로 옮겨다 놓았다. 무겁고 힘이 들어 헐떡거리며 화분 두 개를 옮겨서 부엌에 놓으니 크지 않은 부엌이 꽉 찬다. 나누어 먹는 즐거움이 아무리 크다 한들 내 입으로 들어가는 기쁨만큼이야 할 것인가. 아무리 허리가 아파도 그 뻔뻔한 놈들이 계속 따먹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왜? 배고픈 동물들이 먹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라며?” 


남편이 혀를 차며 한마디 한다. 


  “그놈들이 몽땅 먹어버리면 안 되니까….” 


부엌에서 특별 보호를 받고 자란 토마토는 어쩐지 영양실조같이 보이지만 그래도 이따금 따먹는 기쁨은 자못 크다. 도둑질해 간 놈들을 용서해 줄 아량도 생겼다. 이렇게 한 계절을 부엌에서 함께 비비적대며 보낸 토마토 화분들은 온갖 복잡한 속내를 훑어놓고 유유히 한 계절을 접고 볼품없이 앙상하고 쭈그러든 몰골이 되어 바람에 날리는 낙엽들이 쌓여있는 뒷마당 한구석으로 쫓겨났다. 모종에서부터 소똥에 영양분 섞인 흙 봉투까지, 투자액을 계산해보면 본전 옆에도 못 갔지만 어디서 그 값으로 그 큰 기쁨과 설렘과 깨달음을 건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정성이라니…! 꿈과 설렘과 낙심. 그리고 농부의 고통까지도 생각하게 해준 토마토는 채소들과 함께 매일 아침상에 오르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다. 허나 토마토가 과일이면 어떻고 채소면 어떠랴…, 본질 자체가 그대로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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