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되게 미워하기

미워도, 메시지만

by 소풍보름

#1. 금사빠

금세 사랑에 빠지는 사람. 나는 금사빠였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감정을 금세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좋고 싫음을 ‘정직하게’ 내색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그러다 보니 쉽게 고백하고 번개처럼 차였다. 편의점에서도 차여보고 도서관에서도 차여봤다. 서투른 마음 표현이 부른 시도 때도 없는 참극이다.

정 반대의 일도 있었다. 나는 절교도 많이 했다. 싫으면 그냥 마음으로만 싫어하면 될 것을 굳이 ‘절교 선언’까지 했다. 친구가 싫으면 대화조차 하지 않았고, 만약 선생님이 싫으면 ‘과목과 절교’를 했다. 역시, 서툰 마음 표현이 가져온 자해행위였다.


#2. 결혼식을 하는 이유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바뀐다. 타인에 대한 감정이나 판단이 바뀌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쉽게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가친척과 지인들을 불러 모아 결혼식을 연다. 결혼식은 영원한 사랑을 공개적으로 약속하는 의식이다. 더 이상 말 바꾸기 힘든 상황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수시로 바뀌는 마음을 함부로 표현하지 못하도록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것이다.


#3. 표현의 신중함

나이가 들수록 표현이 신중해진다. 특히 조직 내에서 누군가를 존경하거나 아끼는 행위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쟤는 누구누구 라인이야’라는 말이 돌거나 사내정치를 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일단 말이 돌고 나면 소문은 사실이 된다. 그에 대한 나의 평가는 수시로 변하고 그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 소문의 족쇄에 묶여 자유를 잃게 된다.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조직 내에서 누군가와 감정적인 대립을 한다. 직급 고하를 떠나, 인간적으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만약 공공연하게 이 사람을 험담하거나 미워하는 말을 하게 되면, 나중에 이 사람에 대한 나의 평가가 변해도 태도를 바꾸기 힘들어진다. 마치 진영을 바꾸는 철새 정치인인 듯, 주변 사람들은 나를 변절자로 취급한다.


#4. 세련되게 미워하기

감정은 말랑말랑하지만, 일단 표현하고 나면 콘크리트를 치는 것과 같다. 돌려놓을 여지를 주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킨다. 절교한 친구와는 지금도 연락이 닿지 않으며, 싫어했던 선생님의 과목은 결국 내 대학입시의 발목을 붙잡았다. 회사에서는 정치질을 한다는 오해를 받았고, 15년 전 싫어했던 조직 내의 누군가를 일편단심으로 미워하고 있다. 감정적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전공을 하며 SMCRE 이론이라는 것을 배웠다. Sender, Message, Chennel, Receiver, Effect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든 이론이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고 해석되는지를 설명하는 기본적인 모형이다. 이 이론을 잘 살펴보면 세련되게 미워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인다.

회사이던 어디이던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하는 말도 귀담아들을 메시지가 있다. 아무리 그 말이 스스로의 허물과 거짓을 덮기 위한 말이라도, '메시지'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죄는 미워해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Sender는 미워해도, Message는 미워하지 말자. 그것이 내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세련되게 미워하는 방법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 메시지만 주목하자.

그리고, 나처럼 ‘정직한’ 표현은 좀 삼가자. 그럼 된다.

keyword
이전 06화속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