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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르미 Jul 29. 2021

딸을 위해 다시 쓰는 엄지공주 #4.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호접지몽.     


  떨어지며 꾸는 찰나의 꿈. 소녀가 나비인지 나비가 소녀인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소녀는 은빛 가루를 날리며 흔들리는 폭신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의 정체는 소녀의 근처에서 기다리던 ‘그 나비’였다. 소녀가 나비를 연잎 배에 묶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나비는 소녀를 구해줄 수 있었다. 빨리 가기보다 함께 가는 것이 더 나은 이유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보통 어른이 된 나비는 오래 살지 못한다. 사하라 사막을 건넌다는 작은멋쟁이 나비는 겨울도 날 수 있다지만, 소녀를 구해준 나비는 평범한 배추흰나비였다. 나비를 떠나보낸 소녀는 혼자가 되었다. 만나고 이별하기를 거듭하며 소녀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그리고 겨울이 왔다.     


  새들은 날아가고, 나무와 꽃들도 모두 시들어버렸다. 노란 붓꽃으로 만든 옷으로는 지독한 추위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소녀는 바들바들 떨며 따뜻한 곳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얼어붙은 숲 끝자락에는 오래전에 수확이 끝난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다. 먹을 것이 있을까 하여 둘러보았지만, 땅은 온통 얼어 있었다.


  밤이 되었다. 소녀가 세상에서 맞는 마지막 밤이 될 수도 있는 밤. 튤립 침낭은 겨울에는 더 이상 따뜻한 잠자리를 주지 못했다.     


  꽁꽁 언 손에 입김을 불며 바라본 밭 모퉁이에 슬쩍 빛이 새어 나오는 구멍이 있었다. 소녀는 잠시라도 추위를 피해보려고 그 구멍으로 들어갔다.     


  구멍 안은 따뜻했다. 한쪽에는 보리 이삭들이 쌓여 있었고, 그 밖에 먹을 것들도 잔뜩 있었다. 이틀을 굶었던 소녀는 정신없이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구멍의 주인이 나타났다. 들쥐 노파였다.     


  “저런, 불쌍한 어린것.”     


  먹을 것을 잔뜩 쌓아놓은 구멍의 주인에게는 구김살이 없었다. 소녀는 모처럼 따뜻한 음식을 대접받고 훈훈한 잠자리에서 잠들 수 있었다.     


  들쥐 노파는 소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겨울 동안 함께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 대신 소녀는 노파의 집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잠들기 전 노파에게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들쥐 노파는 소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며칠 후 들쥐가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청소를 깨끗이 해야 한다. 곧 손님이 오거든.”

  “네 할머니.”

  “그 손님은 어마어마한 부자란다. 나보다 집도 크고 방도 더 많아. 근사한 벨벳 코트를 입지. 네가 그 손님과 결혼한다면, 너는 아마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더 이상 겨울이 두렵지 않게 되겠지.”     


  손님, 두더지가 찾아왔다. 들쥐 노파는 두더지가 문턱에 들어서면서부터 칭찬과 아부를 멈추지 않았다. 두더지가 얼마나 부자인지, 얼마나 지혜로운지, 그의 집이 얼마나 넓은지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두더지는 땅 속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고, 태양이나 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들쥐 노파는 소녀를 두더지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애썼다. 노파는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이유로 점점 소녀를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 세상 모든 일에 빛과 어둠이 함께 있다는 것을 소녀는 추운 겨울 들쥐의 구멍에서 배워 갔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노파의 청을 따라 소녀는 두더지가 올 때마다 노래를 불러야 했다. 두꺼비와 나비와 풍뎅이가 나오는 그녀의 노래와 이야기는 두더지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두더지는 노파의 집과 자기 집 사이에 파 놓은 굴을 보여주었다. 들쥐와 소녀가 필요할 때마다 써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 굴에 죽은 새가 있으니 놀라지 말라고 했다.     


  두더지는 길고 어두운 통로로 소녀를 안내했다. 천정에 두더지가 주둥이로 구멍을 내자 통로 한가운데 제비 한 마리가 고개를 깃털 속에 묻고 누워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추운 겨울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소녀는 구멍 밖에서 만났던 추위가 생각나서 몸서리를 쳤다. 한편 여름 내내 노래하며 재잘거리던 새의 모습이 그립고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     


  두더지는 짧은 다리로 새를 툭 차면서 무심하게 내뱉었다.     


  “봄 여름 가을, 시끄럽게 울어대기만 하더니 이렇게 됐군. 겨울이 될 줄도 모르고 말이야. 나처럼 열심히 살았어야지. 내가 새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르는군.”     


  들쥐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요. 역시 두더지님은 참 현명해요. 노래를 아무리 잘하면 뭐합니까? 겨울에 이렇게 춥고 배고파 죽는데 말이에요?”     


  소녀의 생각은 좀 달랐다. 여행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모든 생물이 각자 사는 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제비는 제비답게, 두더지는 두더지답게 산다. 두더지가 제비처럼 날 수 없는 것처럼, 제비도 두더지처럼은 살 수 없다.     


  그렇지만 소녀가 깨달은 또 한 가지는, 모든 생각을 모두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녀는 잠자코 있다가 일행이 등을 돌려 앞서가자,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허리를 숙여 새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날 밤, 소녀는 죽은 새가 생각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비록 먹을 것이 없어 들쥐와 두더지의 신세를 지는 몸이었지만, 제비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소녀는 밤새 지푸라기로 이불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을 죽은 새에게 가지고 가서 덮어 주었다.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도록 새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다시 안아주었다.     


  두근.     


  그때, 작은 고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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