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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vole Bianche 흰구름
그림자의 정체
by
이제은
Jun 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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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집안일을 마치고 잠시 소파에 앉았다.
등을 기대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머리도 기대 보니 역시 편안했다.
기분 좋은 편안함에
노곤해진 근육들이 스르르 풀리며
눈꺼풀도 스르르 감겨왔다.
움움움, 움움움
간신히 한쪽 눈을 반쯤 뜬 상태로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둘러보니
잠들기 전에 맞춰놓은 타이머의 울음소리였다.
잠겨서 자꾸 끊어지는 목소리로
알렉사에게 타이머를 멈춰달라 부탁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내 부탁이 들어졌다.
나는 다시 소파에 누워
엄마가 만들어주신 퀼트 인형들을 베고
쏟아져오는 잠에 내 몸을 항복했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이른 오후의
빛은 결코 막강한 잠을 이겨내지 못했다.
분명 그렇게 눈을 감았는데
어느 순간 다시 눈을 떠보니
고개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고개뿐만 아니라 내 몸의 어느 부위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눈동자마저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에는 하얀 벽과 퀼트 인형의 귀와
소파 옆 엔드 테이블 위의 베이지 전등의
모서리가 조금 보였다.
'혹시 지금 가위에 눌리는 건가?'
나는 패닉 하지 않기 위하여
숨을 천천히 깊게 들이마시려고 했지만
그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아래로 정체모를 어둔 그림자를 본 순간,
두근두근두근두근!
그때 누군가 나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마치 잠들기 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엄마의 손길 같은.
하지만 이 집엔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뒤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몸은 마치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가슴에서 뛰쳐나올 듯
팔딱팔딱거렸고
두 눈은 감기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주기도문과 성모송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팔딱거리는 것은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겉보기에는 편하게 누워있어 보였겠지만
속으로는 덜덜 떨면서 기도문들을 읊고 또 읊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웬만하면 금방 가위눌림에서 해방되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토록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인지,
애초에 나는 왜 잠이 들어버렸는지,
혹시 무리해서 집안일을 한 탓인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어느덧 심장박동도 천천히 제 속도로 돌아오고
언제까지고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을 것 같았던
목과 어깨, 팔과 다리, 그리고 손가락들에도
누군가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듯
천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허겁지겁 소파에서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어둔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뒷걸음쳐서 달아날 수 있는 자세로
비장하게 그림자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다름 아닌...
왼쪽 연한 녹색이 깨송, 오른쪽 하얀색이 깨둥
내가 베고 자던 퀼트 인형의 쌍둥이 퀼트 인형이 놓여있었다.
'아하..하..하...하하하!!!!!'
나는 혼자 크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집안에는 나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곤 괜히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아
퀼트 인형들을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이 하마 형제 인형들에게 엄마가 붙여준 이름은
깨둥깨둥의 깨둥 (하얀 하마, 형)
깨송깨송의 깨송 (녹색 하마, 동생)이었다.
"의심해서 미안.
근데 깨둥아, 다음번에는 내려와 앉아있어 주겠니?'"
나는 깨둥이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엄마가 만들어주신 퀼트 쿠션들과 깨둥 & 깨송 하마 형제 인형들.
깨둥은 나름 일깨움, 깨달음 (Awakening)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만.
엄마는 나와 동생 J에게
깨둥깨둥 열심히 일하고
깨송깨송 재미있게 하루하루 지내라며
정성스레 이 하마 형제 퀼트 인형들을 만들어주셨다.
깨둥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는데
영어로는 일깨움, 깨달음 (Awakening)이라는
나름 위대한 뜻을 지닌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나 혼자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아침저녁으로 깨둥이와 깨송이를 바라보며
오늘도 깨둥깨둥 열심히 살아야지,
또 깨송깨송 재미있게 살아야지
다짐하고 스스로와 약속한다.
깨둥이와 깨송이
의 응원에 힘입어
오늘도, 내일도
깨둥깨둥, 깨송깨송 잘 살아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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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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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
당신의 마음을 알아봐주고 당신과 마음이 통하는 지기(知己)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함께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갈 수 있도록 공부하고 있습니다. 책과 음악, 자연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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