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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은 Mar 28. 2021

누구를 위해 유튜브를 보는가


내 동생 J가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야, 이거 봐 봐!!!!”  깜짝 놀란 나는 (평소에 잘 놀라는 스타일) 서둘러 동생의 핸드폰을 보았다.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뉴스 라도 떴나 싶은 놀란 마음으로 본 화면에는 새벽형 인간으로 사는 삶을 멋있게 보여주는 유투버의 영상이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 아니 어떻게 사람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일어나서 생활할 수 있지?’  놀라며 이 유투버의 굉장히 열정적이고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는 모습과 그 유투버의 남다른 마인드와 실천력에 감탄했다.

그렇게 영상을 본 후 J는 한층 풀이 죽은 얼굴로 조그맣게 말했다. “우와.. 부럽다. 저 사람은 뭐에다가 (직업) 뭐도 있고 (집, 물건들) 뭐를(성취한 거) 했는데... 나이도 나랑 비슷한데... 진짜 부럽다….” 영상을 보기 전 흥분했던(excited 된) J는 어느새 고개를 떨군 채 우울함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유투버를 동경하다가 그 유투버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 자신과 비교하며 ‘왜 나는 못했지? 나는 그동안 뭐했지? 왜 나이도 비슷한데 나는 저렇게 이룬 것이 없지?’ 라며 자신을 자책하는 말들을 하였다. J의 말들에는 부러움, 진 것 같은 기분, 후회, 그리고 좌절감들이 담겨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은 그 유튜브 영상을 보고 난 후 5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튜브 영상이나 sns 이야기들은 분명 누군가에게는 긍정적인 자극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똑같은 것을 보고 자신을 그 콘텐츠의 사람과 비교하며 자신도 모르게 밀려드는 부러움, 질투, 혹은 좌절감을 느낄 수도 있다. 저 사람은 분명 이러이러할 것이다 (예: 금수저 일 것이다) 확실히 J는 유튜브를 보기 전보다 행복감과 자존감은 확실히 저하되어있었다. 좋은 취지에서 만들어졌을 영상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 처음의 좋은 취지로 전달이 될까? 아니면 만든 사람의 몫이 아니라 그것은 보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온전한 몫인 걸까? 그것은 누구의 몫인가? 어떤 이는 내가 원하고 정해서 SNS를 하고 유튜브를 보는 것이니 그 책임은 본인에게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불만 있으면 보지 말던가~ 왜 굳이 자기가 보고 저런데?”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요즘 세상에 SNS나 유튜브를 안 하고 살기 솔직히 힘들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매개체이고 갑자기 sns를 안 하면 사람들과 소통이 단절될 수도 있고 또 그런 두려움들이 생긴다. 즉 모두가 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뭔가 피해를 입을 것 같은 불안감이라고 할까? 

넘쳐나는 sns와 유튜브의 정보들 안에 우리는 매 순간 광고회사의 먹잇감이 되어있다. 돈을 쓰라고, 그러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수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내가 나 스스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조건 sns를 끊는 것? 유튜브를 안 보는 것?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선택들로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것들- 우리가 sns를 통해서만 연락할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연결, 혹은 나에게 유용한 지식들을 쉽고 빠르고 무엇보다 공짜로 제공해주는 편리한 유튜브 영상들.  다시 돌아가서 말하면 우리가 이로운 점들만 추구한다면 (미생에서 장그래의 대사처럼) 더없이 좋을 테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힘들다.


정답은 없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히 아는 것은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무한한 정보사회가 우리의 삶에 주는 이로움을 십분 활용하되 그 정보들을 받아들이는 건강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생각의 근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힘.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조금의 해답을 제시하는 책은 엔디퍼디컴의 ‘당신의 삶에 명상이 필요할 때’이다. 그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명상수행을 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 저자에게 그의 멘토스님이 말한다. 머릿속을 차도라고 생각하고 수많은 종류의 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장면을 생각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 차들 하나하나가 바로 저자의 생각이며 마치 지나다니는 차를 일일이 멈추고 제어할 수 없듯이 저자의 생각 또한 그냥 스쳐 지나가게 놔두면 명상이 훨씬 쉬어질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내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냥 스쳐 지나나게 놔둔다' 이였다. 어떤 것의 본질만 받아들이되 그 외의 것들은 그저 지나가게 내 마음에서 놓아주는 것. 


다시 내 동생 J의 유튜브로 돌아가 보자.  본질은 새벽 4시 반에 기상하는 유투버가 생산적인 하루를 보낸다 라는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그 이외의 것들은 그 유투버의 스펙, 나이, 성별, 물질적인 것들 (집, 차, 직업), 관계(영상 안에서 보이는) 등등이다. 분명 영상을 보고 있는 순간에는 자연스럽게 그 외의 것들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들것이다. 마치 머릿속에 갑자기 엄청 있어 보이는 포르셰 같은 외제차가 한대 등장한 것이다.  여기서 J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J에게 물어보기 전에 나는 내가 그 영상을 보고 혼자 생각한 것을 적어보았다. ‘어 멋진 차가 지나가네?’ 하며 그냥 별 감정 없이 그 차가 지나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즉 그냥 ‘저 유투버는 의지가 강하네. 굉장한데? 나도 한번 내가 제일 생산적인 시간이 언제 인지 알아내서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봐야지.' 

그러고 나서 나는 J에게 간단하게 책의 내용을 설명해주고 J에게 물어보았다. 여기서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속으로 분명 이제는 나와 같은 ‘명상을 통해 통달한' 생각을 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J의 대답은 전혀 내 예상과 달랐다.

“음.. 만약에 그런 멋진 차가 내 머릿속을 지나간다면 말이야... 나는 내가 그 차를 가질 거야.  내가 그 차에 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지! ”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서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J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내 머릿속에 그 멋진 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야.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그리고 나는 나에게로 돌아가는 거야. 바로 내가 그 차를 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예 그 차 주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거야. 그 차 주인을 부러워하며 내 신세를 한탄하는 게 아니라 나도 그 차를 타면 되는 거야. 그것을 내 차로 만들어버리면 되는 거지. 자 이제 고민은, 어떻게 하면 그 차를 내 차로 만들 수 있는 거지?” 

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난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J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니. 단순히 그 차를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다는 나의 자세와는 달리 J는 그 차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본질을), 나아가 어떻게 하면 그 차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지) 생각한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답은 없다. 내가 J의 대답에 놀란 이유는 모두가 당연히 나와 같이 생각할 것이라는 나의 아둔한 착각과 내가 생각지도 못한 차를 갖겠다는 J의 야심이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스스로 머릿속에 어떤 차(생각)가 지나갈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비록 매트릭스에 나오는 빨간약과 파란 약을 선택해야 하는 엄청난 선택은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그런 선택권 자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오는 흥분(excitement)이 분명 우리의 삶을 좀 더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들어줄 것 이란 것이다. 


일 년 전 나는 웬만한 sns를 끊어버렸다. 한때 댓글 하나하나 좋아요 하나하나 심지어 누가 내 게시물을 읽어봤는지, 만약 읽어보고  댓글이나 좋아요를 안 눌렀으면 왜 안 눌렀을까 혼자 밤새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다. sns가 내 하루를 천국으로 또 지옥으로도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다. Sns와 유튜브가 부정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만든 이의 처음 이로운 취지와 다르게 내 안에서 왜곡되고 변질되어 결국에는 나의 행복감과 자존감을 저하시키는 그 굴레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단순히 그 굴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기에 극단적이지만 과감히 웬만한 sns를 내 폰에서 지워버렸다. 처음에는  당연히 불편하고 어색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자 끊임없이 핸드폰을 확인하지도 않고 또 불안하거나 초조한 마음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오히려 핸드폰으로 책을 읽거나 유용한 유튜브를 보면서 자기 계발에 몰두하고 있다. 


얼마 전 내 생일에 연락 온 사람들은 내 생일을 기억한 가족과 친구들이었지만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sns를 했다면 내 생일에도 몇 개의 게시물과 댓글, 또는 누가 쓰고 누가 안 썼나, 등등을 세고 마음을 쓰느라 온종일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로운 생일을 보낼 수 있었다. BTS 노래 가사 중 ‘스스로 만든 아름다운 감옥’이라는 부분이 있다. 어쩌면 나의 어떤 sns들은 내가 스스로 만든 감옥/족쇄였을지도. 이젠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어야지. 정말 나를 위한 게 무엇인가 생각해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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