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희 May 04. 2022

나무늘보 여인의  작은 이야기

3."빈 빈 곳이 필요해."

2014.04.02


사람에게 집이 중요한 이유는 비바람을 막아주고 몸을 보호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친 마음을 재충전하고 삶을 재생산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정서적인 공간의 의미는 벽으로 막고 생겨난 비어있는 여유분의 공간에 있다.


집 안이 아니더라도 오래 생활하는 장소에서 사람들은 어쩌면 본능적으로 그런 공간을 찾는다. 난 중학교 때는 내가 열쇠를 관리하던 미술실에서 은밀한 휴식을 즐겼고, 고등학교 때는 급식소 뒤쪽의 풀밭이나 편히 누울 수 있는 벤치에서 휴식을 찾았다. 얼마 전 집 옥상에서 작업을 하며 또한 그런 달콤함을 맛보았다. 내가 사는 원룸엔 빈 여유 공간이 전혀 없으므로, 그나마 옥상이라는 곳이 있어 그 와중에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몇몇의 담배를 피우러 나오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한밤중에 조용한 도시를 느껴 볼 수도 있고, 마당에서 해야 하는 뭔가 먼지가 나고 다듬어야 하는 일도 할 수 있어 좋다.


공간을 소유하는 것은 쓰이는 곳보다 준비된 빈 곳을 소유하는 의미가 크다. 도시에서 그런 공간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고 많다. 공유지인 빈 곳은 그래서 중요하다. 내가 소유한 공간은 아니더라도 찾아갈 때 항상 비어있는 그곳. 언제나 열린 품을 가진 곳. 그곳으로부터 어떠한 외부의 간섭도 받지 않고 생각이든 무언가를 하는 과정을 천천히 풀고 즐겨 볼 수 있다.


빈 곳에서 묘한 기분과 설렘을 느끼는 것은 시끌벅적한 도심 속의 빈 곳일수록 더욱 느낌의 강도가 더해진다. 홍대 입구역 공항철도가 공사를 마친 직후 새로 생긴 역 출입구 쪽에 커다란 빈 곳이 생겼다. 도시 한복판의 소음과 쉴 새 없는 리듬에 깨진 조용함과 느림들이 그곳으로 다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주말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군무를 맞춰보기도 하고, 평소엔 사람들이 드문드문 숨어있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도 보았다.

빈 곳의 빈 곳만 보면 뭐라도 심어서 미화를 하고 조경을 하고 이것저것 들여놓기보다 드러나 깨끗하게 빈 땅덩이를 두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의 정서 순화와 휴식에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 비어있는 곳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을 거리감을 두고 풍경을 보듯 조금 떨어져 볼 수도 있고, 노출된 공간을 보며 새로운 상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큰 도시에 드문드문 넓은 공터가 있는 모습은 더욱 활기가 있을 것 같다. 엄청난 공간개발 덕에 대단히 인상적인 도시의 경관 속에 살게 되었지만 우리는 잠시 마음의 짐을 부려 두거나 춤추기 위해 내딛을 만한 공간을 잃어가고 삶 또한 그러한 경관을 닮아 가는 것 같아 아쉽다.      

[출처] 3. 나무늘보 여인의 작은 얘기 - "빈 빈 곳이 필요해."|작성자 onlyweekdays


이전 03화 나무늘보 여인의 작은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