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는 우주의 무중력에 몸을 맡긴 채 두루뭉술하게 떠다녔다.
그 어떤 의지도, 열정도 사라지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끝없는 우주를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의 기억은 누군가가 머릿속 스위치를 꺼버린 듯 피로 물든 지옥 속에서 절망에 빠진 하라의 희미한 얼굴과 처량한 찬솔이의 울음소리의 머물러있다.
특별할 것 없는 삶의 반복, 벌레조차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점점 지치고 늙어가는 그였다. 시간이 꽤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 자신의 죽음을 목격했다.
총구를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이, 200km로 달리는 기차에 뛰어드는 장면이, 까마득한 높이의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장면 속 자신의 모습이 두려울 정도로 가깝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럴 때마다 그와 너무나도 닮아있는 찬솔이가 떠올라 결국 포기하고 만다. 모든 의욕과 열망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는 불안과 불면증이 자리 잡았다.
하던 일은 그만둔 지 오래였고,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그에게는 대재앙처럼 다가왔다. 그는 제발 자신을 여기서 꺼내달라고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매일매일 빌었다.
그는 신이든 사람이든 아무나 자신의 간절한 속삭임을 들어주기를 바랐다. 그는 몇 번이나 정신 차리려 노력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에 혼자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 집 앞 편의점에 가서 독한 담배도 사보고, 아무도 없는 캄캄한 운동장으로 가서 뛰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뛰는 순간 후회하고 말았다.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지면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게 될 뿐이었다. 계속되는 실패와 좌절을 겪을수록 그는 더 깊은 우울감에 잠식되어 갔다.
하지만 그가 이겨 낼 수밖에 없었던, 이겨 내야만 했던 이유가 존재했다. 어느덧 중학생이 된 아들 찬솔이와 자신만큼 어쩌면 자신보다 더 고생하고 있을 하라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문을 열고 수많은 두려움을 마주한다. 그들은 오랜만에 다 같이 외식을 하러 나갔다.
밖으로 나가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일은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고, 그는 이 순간을 위해 남몰래 홀로 매일 밤마다 쓸쓸히 고통을 견뎌냈다.
그간의 노력들이 결실을 맺은 건지 이제는 밖으로 나가는 일은 견딜만해졌고, 가족이라는 존재가 그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아들, 아빠 좀 잡아줄래?"
그의 왼쪽 팔은 항상 찬솔이의 몫이었고 찬솔이가 팔을 잡아줄 때마다 그는 자의식은 더욱더 강하게 느껴졌다.
보통의 아빠와 아들의 관계란 아버지는 아들을 믿어주고 지지해 주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의지와 교훈을 얻는다. 그게 보통의 아버지와 아들의 올바른 관계이다.
하지만 자신이 찬솔이를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 찬솔이가 없으면 차에 치어 죽게 될 거라는 사실, 찬솔이가 없으면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는 것조차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해졌다.
그렇게 그들은 걸어서 3분 정도 걸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 식당의 원래 이름은 ‘유미 식당’이었는데 오래된 탓인지 마지막 글자가 지워져 ‘유미 식’이라고 쓰여있었다.
그 안에는 4명이 앉을 수 테이블이 식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적한 골목에 있어 주로 단골들만 찾아왔다.
"돼지고기 3인분 주세요."
하라가 자리에 앉자마자 주저 없이 말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식당 여주인이 그들을 알아보고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네요."
"이 아이가 그때 그 아이예요?"
"네, 많이 컸죠?"
"남자답게 잘 컸네요."
"네."
하라는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것처럼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다 식당 여주인이 준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여주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방으로 갔다. 하라는 안심 하듯 숨을 한 번 내쉬고 준서와 찬솔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멍한 눈으로 하라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옆에서 찬솔이는 귀가 빨개진 채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하라가 그의 접시에 고기를 올려주고 그는 올려진 고기를 먹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
젓가락 소리와 고기 씹는 소리가 조용한 식당에 울려 퍼졌다. 참다못한 준서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항상 같은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여보, 요즘 일은 어때? 힘들진 않아?"
하라는 그를 한 번 쓱 보고 대답했다.
"괜찮아."
또 한 번 정적이 흐르고, 그가 이번에는 찬솔이에게 물었다.
"넌 좀 어떠니? 축구는 잘하고 있니?"
"네."
그의 질문에 찬솔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몇 마디 하지 않았고, 30분 만에 음식을 먹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앞쪽에서는 준서와 찬솔이가 걷고 있었고 그녀는 한걸음 뒤에서 걷고 있었다.
“어머니, 얼른 오세요.”
찬솔이가 재촉하듯 말했다.
“어, 갈게.”
그들은 집으로 가기 전, 공원을 산책했다. 칼날에 베이는 듯한 고통을 실은 바람이 불었지만 그녀는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닌 공원으로 가는 길로 가자고 끈질기게 오복조르듯 했다.
그들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움츠리고, 어느 한적한 산책로를 유유자적하게 걸었다. 남들이 볼 땐 특별할 것 없는 무채색에 가족들로 보였겠지만 실상은 여러 가지 색상들로 뒤섞여 이도저도 아닌 색을 가진 그들이었다.
“어머니, 너무 추운데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어? 들어가자고?”
그녀가 당황스러운 듯 말했다.
“안 추우세요?”
“춥지.”
그녀의 뿌연 입김이 천천히 밤하늘의 공기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여보, 들어가자. 춥다.”
“그래, 들어가자.”
그녀가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찬솔이는 어머니가 무슨 연유로 굳이 이 추운 날에 사람 하나 없는 공원을 가자고 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머리가 깨질 듯한 강추위에 아버지옆에 꼭 붙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안락한 집에 도착했고, 준서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녀가 찬솔이를 불러 세웠다.
“왜요?”
그들은 그의 방으로 들어가 살며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너 혹시 아버지가 창피하니?”
“네?”
그는 꽁꽁 숨겨둔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반응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아버지를 왜 부끄러워해요.”
“그런데 아까 왜…”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이내 심란한 표정에서 묘한 표정으로 변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해,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그래. 푹 쉬렴.”
그는 그녀가 나가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깊은 안도감에 빠져들었다.
사실 그녀의 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하지만 그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불효자가 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싫었기 때문이다.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난과 지탄이 두려웠다.
그의 이러한 잘못된 관념은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는 학부모 참관시간만 찾아오면 다리를 덜덜 떨었다. 수업이 시작되면 불이 꺼지고 하나의 조명이 준서를 환하게 비추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유일하게 켜진 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빛 속에는 선글라스를 쓴 한 남자가 서있었다. 그 남자는 동정심과 기묘한 표정이 섞인 그들의 시선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군중들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후부터 친구들의 순수함이 담긴 질문과 수백 수만 개의 눈동자들로부터 도망치기 바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그의 키는 훌쩍 커버렸고,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남자의 이미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성숙해진 모습과는 반대로 그의 마음의 크기는 몇 년 전 그곳에 멈춰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평범한 어린아이의 불과했다. 그는 그것들로부터 여전히 도망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