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P(University of the South Pacific)를 돌아다니다보면 와이파이가 희미하게라도 터지는 곳이 있다. 와이파이의 행방을 찾아서 그동안 보내지 못했던 손 편지와 색종이 카네이션을 찍어서 가족 그룹채팅방에 전송했다.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잘 지내냐.', '밥은 잘 먹고 있냐.', '힘든 것은 없냐.'
는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나는 전기도 불안정하고, 물도 부족하고, 먹고 싶은 음식이 너무 많다는 류의 괜히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은 다 빼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맛있는 해산물을 원 없이 먹고 있고, 매일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힐링하고 있어요. 모두 잘 지내시죠?'
라고 답장했다. 뭐 거짓은 아니니까.
그간 질문의 방향은 대개 일방이었고 나를 향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부모님께 뭘 드셨는지, 어떤 하루를 보내셨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는지, 어떤 노래를 좋아하시는지 묻고 싶다.
열역학 제0 법칙은 열평형에 관한다. 온도가 높은 쪽이 자신의 열에너지를 낮은 쪽으로 전달하여 자신은 낮추고 상대는 높여 열의 평형을 이룬다. 이처럼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양육하고, 자식은 부모를 효로 봉양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이 온전한 자연의 이치가 때로는 잔인하다고 느껴지기도한다. 어느날 우연히 펼쳐보았던 할아버지의 일기장이 아직도 내 마음에 진하게 풍긴다. 문득 거울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보시며 ‘내 모습이 영락없는 할아버지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서글퍼 눈물이 났다는 내용, 병과 죽음을 두려워하시는 내용… 이는 비단 할아버지만의 일기가 아닌 우리네 일기일 것이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인생이 아릴만큼 한탄스럽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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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에메랄드 라군에 가 발을 담갔다. 주변 환경을 닮는다고 하는데 'B-612' 사람들은 바다를 닮아 너그럽고 느긋한가 보다. 멀지 않은 해변의 나무 그늘에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드러누워 하늘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닷물결이 내 발등을 간질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들리지 않는 그들의 대화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대화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 여유가 부러웠다.
오늘의 하늘이 어떤 색인지 우두커니 바라본 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구름의 흐름을 따라 눈동자를 옮겨본 적이 얼마나 있으며, 매일 변하는 달의 형태와 꽃의 피고 짐을 기억하는가. 사랑하는 사람(가족)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나는 아는가. 모든 것이 느긋하고 유유히 흐르는 'B-612' 속에 살다 보니 그제야 내가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바다 옆으로 길게 늘어선 해안도로 위에는 선팅되지 않은 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 않고 그저 시속 30km의 속도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