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15 / 눈을 감아야 비로소 선명해진다

by BO

머릿속으로 수십 번도 넘게 그려본 'B-612'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보기 위해 도로 옆 야자수 숲에 들어가자 곧 TV에서나 봤던 오두막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나왔다. 즐겁게 뛰어놀던 아이들이 나를 보더니 일제히 얼어버린 듯 동작을 멈췄다. 아마도 관공서, 마트쯤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외국인을 현지인이 거주하는 동네에서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 긴장한 것 같아서 손 인사와 함께 밝게 웃으며 필사적으로 친근감을 표현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여전히 얼어있었다. 순식간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얼음땡 놀이의 술래가 된 나는 술래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멋쩍은 미소와 가벼운 인사만을 남긴 채 야자수 숲 더 깊이 들어갔다. 비슷한 형태의 집들이 반복해서 나왔고 종종 나무집이 아닌 회색 벽돌로 지어진 집과 지붕만 있고 사방이 뚫린 넓은 건축물(*이 건축물의 이름은 마네아베이며, 마을에서는 마을회관으로 쓰인다.)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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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612'는 세계 최대의 참치 어장이다. 한국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싱싱한 참치를 여기서는 길가에서 9천 원이면 살 수 있다. 참치로 항공료 본전 뽑아야겠다.

내게 처음 생선 손질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이는 크리스틴이라는 여학생이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영어도 잘해서 소통에 지장이 없기에 'B-612'의 다양한 문화를 배울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생님이자 친구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B-612'의 주식은 생선을 비롯한 해산물이므로 생선 손질은 필수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참치 손질은 ['B-612'에서 살아남기] 그 첫 번째 수업인 셈이었다. 손질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지느러미를 잘라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하기만 하면 됐다. 손질된 생선은 각자의 기호에 맞게 회를 뜨거나 탕을 끓이거나 구이를 하면 된다.

손질된 참치를 굽기 위해 마당에 숯불 그릴을 세팅했다. 먼저 넓은 통조림 깡통의 밑부분을 잘라서 코코넛 껍질을 채워 넣고 불을 붙였다. 코코넛은 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코코넛 물로는 목을 축일 수 있고, 말랑말랑한 과육은 맛과 영양 모두 최고다. 단단하게 익은 과육은 갈아서 요리에 쓸 수 있는데 코코넛 특유의 향을 더해 음식에 풍미를 더해준다. 또한 껍질은 아주 좋은 장작이 되어준다. 숯 대신 코코넛 껍질 장작을 넣은 뒤 그릴 판을 덮고 그 위에 호일을 감싼 참치 덩이를 올림으로써 참치구이 준비를 마쳤다. 코코넛 장작에 붙은 불이 활활 타올랐고 순식간에 그릴을 달궜다. 지글지글 소리와 함께 육즙이 뚝뚝 떨어졌다. 맛있는 냄새를 머금은 연기가 하늘 높이 퍼져 순조롭게 구워지고 있음을 알렸다. 갓구운 참치를 크게 한 젓가락 집어 들어 입 안에 넣고 호호 불었다. 고기를 씹으면 살코기가 부드럽게 갈라지며 육즙이 흘렀고 뜨거운 열기와 짭짤함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구이를 비롯한 사르르 녹는 회와 얼큰한 탕도 일품이었지만 무엇보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테라스에 앉아 바다 위로 일렁이는 석양을 바라보며 먹는 저녁 식사는 최고급 레스토랑 부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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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을 따라 도로가 하나 있고 그 옆으로 가로등이 있어서 도로 주변은 어둡지 않지만 도로를 조금만 벗어나 마을로 들어가면 야자수잎 사이로 겨우 보이는 달빛만을 의지해야 한다. 심지어 우물 위치도 몰라서 이곳저곳 한참을 헤맸는데 나무뿌리에 걸려 여러 번 넘어질 뻔하기도 했고, 부딪히지 않기 위해 손을 뻗어 앞을 더듬으며 걸어야 했다. 겨우 우물을 찾을 수 있었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우물물 기르는 요령이 없어서 아무리 두레박을 던졌다가 끌어올려도 번번이 빈 두레박만 올라왔다. 며칠 이곳에 지내며 우물물 기르는 것을 봤는데 그저 두레박을 우물 안에 던졌고 줄을 잡아당겨 올렸더니 물이 가득한 두레박이 올라왔었다. 분명 쉬워 보였는데 막상 해보니 우물물 기르는 것도 요령이 필요했다. 한번 한번 간절한 마음을 갖고 다양한 방법으로 던졌지만 끌어올린 두레박은 매번 나를 허무하게 만들었다. 10번, 20번, 30번... 계속된 도전은 실망과 포기가 가득 찬 두레박만을 건져 올릴 뿐이었다.

지쳐서 포기하고 주섬주섬 물통을 챙기고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마을 청년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도와줘서 물을 떠 올 수 있었다. 그들도 나와 별다른 거 없이 그저 두레박을 던졌다가 끌어올렸을 뿐인데 다른 결과를 얻어냈다. 분명 차이점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유심히 보니 그들은 두레박을 던지기 직전 손목 스냅을 이용해 두레박에 상방 회전을 줘 물이 두레박에 들어올 수 있는 각도를 만들었다. 작은 스냅이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항상 작은 디테일이 큰 차이를 만들어내고,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이 감동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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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다 뜨고나서 해변에 앉았다.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별들은 빛남으로써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문득 치열하게 각자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저 별들이 경이로워 보였다. '나'라는 별은 얼마나 밝게 빛나고 있을까. 질문이 내 속에 메아리쳤다.


우리는 모두 감히 그 무엇도 흉내 낼 수 없는 각자만의 빛을 내는 별이지만, 자주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는 것 같다. 상대방의 단점을 듣는 것에는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나, 그게 각자의 정체성임에도 불구하고 장점을 듣는 순간 잘난척한다며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각자의 빛은 점점 바래가고 사회는 빛의 다양성을 현저히 잃어간다. 어찌 우리는 우리 각자만의 빛을 꺼트려야 하는가. 어찌 수십억 개의 별이 모두 같은 빛을 발해야 하는가. 어찌 모두가 정형화된 길을 걸어야 하며, 어찌 모두가 하나의 평가도구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우리가 더 이상 희미해지지 않고 더욱 증폭될 수 있기를 바란다.


'B-612'의 밤은 유독 어둡기에 동시에 밝을 수 있다. 어두울수록 별은 선명해지고, 선명해지는 만큼 우리는 별에 집중할 수 있다. 이처럼 대상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때로는 외부와 내부의 여러 정보로부터 눈과 귀를 막을 필요가 있다. 외부의 시선과 고정관념, 내부의 자존심은 오히려 대상을 흐리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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