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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떠나는 연습

by 로맹 제이

2004년 3월 아들이 커서 동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첫째 아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그리고 둘째 딸이 다니던 유치원

그 초등학교와 유치원은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제자리에 있다.


먼 해외 타지에서 낯선 이들과 일하고 생활하며 20년 넘게 사는 동안,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는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주변 동네는 재개발, 재건축으로 예전 모습이 사라지는 동안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한 채 20년을 제자리에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파트 창문을 열고 새소리를 들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아침 일과의 하나가 되었다.

주변 모습이 그대로여서 그런지 꿈을 꾼 듯, 시간이 멈춘 듯하다.

순간 이 삶이 꿈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든다.

20년이란 시간은 짧지 않으나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90년대가 저물고 새천년이 시작된 2000년, 일산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회사 사무실이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옮기는 바람에, 서울 입성을 하게 되었다.

조그만 아파트 전셋집을 구해 사는 동안, 둘째가 태어났다.

그리고 몇 해 후, 아이들 장난감, 책 등 짐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나면서 좀 더 큰 집으로 전세를 구해 옮겼다.

거리는 얼마 차이가 나지 않지만 조금 더 서울 중심으로 옮겼다.

거리는 얼마 안 되어도 사는 동네 사람들의 성향은 많이 달랐다.

그때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삭막한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심을 알 수 있었다.


부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동네로 멋모르고 들어와 살면서, 아내도 나도 마음고생을 했던 듯하다.

그들로부터 받은 자극은, 긍정적으로 보자면 세상 물정 모르는 나와 아내에게 현실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라 좋았지만, 한편으로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의 속성으로 인해 서로 비교하면서 스스로 고통을 만드는 부작용도 있었다.

그렇게 서울 생활에 적응하며 세상의 팍팍함을 배워갔고, 점점 더 삶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몇 해 후 과감하게 결심하고, 초등학교 1학년 아들과 유치원다디던 딸을 데리고 해외로 삶의 무대를 옮겼다.

그리고 돌아와 제자리에 다시 앉았다.

20년 시간이 지났지만 삶의 고단함을 알리는 뉴스는 이제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세상이 되다 보니 세상 뉴스를 잘 가려 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이것 역시 노력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는 않은 듯하다.


귀향

혈기 넘치던 30대 젊은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50대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자신들의 삶을 시작하느라 바쁘다.

아이들에게 참 미안한 것이 있다.

그들의 유년시절 친구가 있고, 정겨운 동네사람이 있고, 하굣길에 문방구에 들러 군것질을 하거나 하는 등의 그 나이에 공통적으로 가진 그들만의 고향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

이 공백은 무엇으로도 메꾸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외면한 것은 아닌지.


아이들은 또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우리 모두는 늘 떠날 채비를 하고 떠나겠지만, 돌아올 것이라는, 귀향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떠나는 것이 아닐지.


지난 30년을 돌아보면 늘 떠나는 연습을 했고, 떠났으며 그리고 돌아왔다 다시 떠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작게 보자면 매일의 출퇴근도 그렇고, 해외 출장도 그러하며, 장기간 해외 주재근무도 그 속성은 동일한 것 같다. 떠났다 돌아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떠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언젠가 '돌아올 것,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림출처: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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