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 병동에서 아버지와 이틀을 자고 삼일째는 벌초 때문에 동생을 대신 들여보내고 나는 사촌 형, 사촌동생과 함께 의성에 벌초를 다녀왔다.
병원을 나오면서 코로나 검사 키트를 이용하여 한번, 토요일 벌초 다녀온 후에 또 한 번, 그리고 일요일 아침까지 세 번을 검사해도 모두 음성으로 결과가 나왔다.
아버지는 삼일을 입원하시고 토요일 오전에 동생이 퇴원시켜 드렸다. 그 후로는 멀쩡하게 걸어 다니시고 식사도 나름대로 잘하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본가에서 동반하여 코로나 격리에 들어가셨다.
문제의 월요일이 밝았다.
출근할 때부터 몸살처럼 근육통이 심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출근을 서둘렀다.
회사 근처에 거의 다와 편의점 앞에서 차를 세웠다.
코로나 검사 키트를 사서 차 안에서 바로 검사에 들어갔다.
두 번 검사를 했는데 두 번째 검사에서는 확연히 두줄이 드러났다. 회사에 서둘러 전화를 하고 힘들게 차를 운전해 청도 농막으로 향했다.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지쳐 있었다.
가는 길에 김밥을 사서 갔는데 도저히 먹을 기력이 없어 그대로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본가에 들러 엄마가 드시던 진통제와 해열제를 받아 왔지만 감히 먹을 엄두도 못 냈다.
하루를 그렇게 허비하고 기진맥진해서 누워 있었는데
해 질 녘에 엄마가 밥이랑 국을 챙겨 오셨다.
약이며 밥이며 하나도 먹지도 않은 나를 보시고는
죽으려고 이러냐며 불같이 화를 내셨다.
나는 억지로 두어 숟갈 떠먹고는 그대로 쓰러져 또 깊은 잠에 들었다.
이튿날부터는 약을 먹어서 그런지 몸상태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식욕이 없고 기운이 없었다.
백신을 3차까지 맞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렇게 추석 내내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잠에 취해서 직장인들에게는 꿀 같은 그 황금연휴를 흘려보내고 말았다.
아버지와의 이틀간의 동침의 대가는 내게 너무도 가혹하고 처절한 것이었다.
추석이 끝나고 격리기간도 지나 직장에 복귀했지만 여전히 식욕이 없고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더불어 생활에 대한 의욕도 사라져 버렸다.
시간이 흘러 오늘에서야 나는 예전의 나를 찾은 듯하다.
그리고 나는 말할 수 있다.
다시 한번 그때와 같이 상황이 닥쳐도 나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아버지와의 달콤한 동침을 선택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