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면서 내 의지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세가 빠지게(흔한 경상도 사투리로) 일하고, 가끔은 토요일도 반납해 가며 또 일하지만 정작 우리의 댓가는 만족할 수 없는 급여명세서뿐이다.
감히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쥐꼬리도 제때 못 받는 노동자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나는 오만했다. 그리고 이기적이었다. 나만의 즐거움을 위해 주말마다 출사(출사는 일본식 표현이고 야외촬영이 맞다)를 다녔다.
첫딸이 걸어 다닐 무렵 나는 사진 동호회의 매력에 빠졌다.
나는 사진에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일간지 사진부 기자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졌는데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사진 동호회 회장까지 맡아가며 카메라 장비에 투자를 했다. 소위 뽐뿌가 시작된 것이었다.
애들 돌반지도 마누라가 경품으로 받은 행운의 열쇠까지 팔아서 카메라 장비를 사모았다.
사진 동호회가 문 닫을 무렵에서야 나는 사진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사진 동호회 하면서 찍은 두 딸들의 사진은 우리 집 벽에 떡하니 걸려 있다.
사진 동호회를 떠나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중년이 되어 있었다.
제 버릇 남 못준다고 나는 또 다른 나만의 취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매주 토요일 오후 지인들과 주말 밤낚시를 다녔다.
아내와 딸들에게 나는 주중에는 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빠, 주말에는 잠만 자는 아빠로 각인되었다. 나는 아내와 일요일에 대형 마트에 장도 한번 제대로 보러 가지 않았다.
나는 이제야 아내와 두 딸들에게 브런치를 빌어 미안하다고 사과를 전한다.
2004년 초 나는 삶과 죽음의 순간을 경험했다. 뇌종양 진단으로 내 삶은 한순간에 송두리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 가정은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아내의 최고 관심사였고 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만이 아내와 우리 가족의 전부였다.
나는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왔다.
본 궤도에 오르기까지 나는 삶을 많이 허비한 느낌이었고, 어느새 50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이제 다시 사진 동호회나 낚시 동호회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나는 아내의 도움으로 청도에 주말 농장을 장만했다. 아내는 지금도 그 대출을 갚아 나가느라 여유가 없다.
그래도 나는 주말이면 밭에서 농사도 짓고 음악도 들으며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고 있다.
아내는 한동안 주말에 내가 없으니 고독사 할 것 같다고 으름장을 놓더니 이제야 평일에는 달리기, 주말에는 등산을 다니며 더 이상 내게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지난 추석 연휴에 나는 아내와 튀르키예 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해마다 아내와 단 둘이 해외여행을 떠나곤 한다.
작년에는 캐나다 로키를 다녀왔다. 올해도 아내는 튀르키예 여행에 엄청 만족해했다.
여행도 즐거웠지만 면세점이나 샵에서 아내가 고르는 명품에 내가 오케이라고 말해 주면 더 즐거워했다.
누가 공처가라고 욕해도 나는 아내가 즐거워하면 그것으로 오케이다.
오늘은 농막에서 와인을 마시며 주말을 보내고 있다.
파바로티와 크랜베리스, 그리고 건스 앤 로즈의 LP판을 들으며 이 밤을 하얗게 지새워도 좋다.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시간이다.
"Do not disturb me "
https://youtu.be/iN9CjAfo5n0?si=RkR9UruIxJChpu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