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에 대해
내 청춘의 영원한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대한민국에 태어나 이변 없이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12년간의 학교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다. 대학은 선택이라고들 하지만 의무에 가까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12년의 세월을 거쳐 비로소 ‘청춘’이라는 관문에 들어간다. 청춘靑春. 푸를 청에 봄 춘. 새싹이 돋아나는 봄의 초입. 10대 후반을 거쳐 20대까지 우리는 새싹을 틔우는 시기인 것이다. 과연 우리의 청춘은 정말로 푸른 봄일까? 가장 좋을 때라고 불리는 시절인 20대, 그러나 왜 청년 자살률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걸까.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이 구절은 모든 청년이 겪는 방황을 설명한다. 어디에도 정답이 없다. 정답인 줄 알고 달려 도착한 이곳도 사실은 아니었다. 좋은 대학, 안정적인 직장, 결혼 등 사회에서 세워준 가이드라인을 밟아보고 나서야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청춘은 계속해서 도망치는 존재다. 시에서 말하듯 뭐가 됐든 ‘이것은 아닌’, ‘여기가 아닌 ’ 곳으로 하염없이 헤매야만 하는 것이다. 헤매는 게 청춘이라면, 어쩌면 평생이 청춘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청춘이 겪는 우울과 불안이 방황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방황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당연한 일이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그저 나그네처럼 여기저기를 누비는 게 우리의 숙명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정답이 있다고 가르친다. 방황해선 절대 안 되고, 사회에서 그린 이정표를 따라 사는 것만이 옳다고 한다. 그 이정표를 따르지 않는 자는 패자가 된다. 우린 어린 시절부터 패자가 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할 뿐이다.
TV드라마에서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두 남녀 재벌가의 집을 배경으로 나온다. 이야기는 행복한 결혼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너머에 어떤 삶이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그닥 아름답지 않고, 재벌은커녕 최저시급이나 받고, 사랑은 늘 실패한다. 사회는 우리에게 삶이 얼마나 초라한지 결코 알려주지 않는다. 실패하고 구질구질한 삶도 삶임을 인정하지조차 않는다. 그저 하나의 이상향만을 제시할 뿐이다. 학교는 그 이상향으로 향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렇기에 나이 앞자리 수가 바꼈단 이유로 사회에 내던져진 20대 청춘은 불안한 존재가 된다. 내가 아는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 그런데 가야할 곳을 모른다. 차라리 정답은 없고 우리는 내내 헤메리란 것을 미리 알려준다면 청춘이 이정도로 우울하진 않았을텐데.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시는 청춘을 세 단어로 설명한다. 괴로움―앞서 말한 방황의 괴로움이다. 외로움―언제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감정이다. 나의 20대 초반은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 매일같이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아르바이트와 학교 수업을 병행하느라 바빴다. 그렇게 청춘의 초입을 몇 년 보내고 나니 문득 외로워졌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근원적 질문이 시작된 것이다.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시간을 가졌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찾았다. 그러면서 외로움이 나를 좀먹기 시작했다. 술잔과 함께 넘긴 시간이 무한히 팽창하는 소음이 되어 나를 고립시켰다. 그렇게 질문의 답에 도착하기도 전 인간은 온전히 혼자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로움은 삶의 동반자다. 오히려 떨쳐내려는 발버둥이 외로움을 더 증폭시킨다. 그러므로 청춘은 외로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외롭지 않으려는 노력보다 잘 달래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어쩌면 고독을 이기는 확실한 방법이다.
그리움―청춘을 지나는 청년들은 과연 무엇을 그리워하는가. 첫사랑일 수도, 멀어진 친구일 수도 있다. 저마다의 그리움이 있다. 30대가 되면 20대가 그리워지고, 40대가 되면 30대가 그리워진다. 그리움을 전혀 모를 것 같은 아이들도 그리움을 안다. 초등학생이 “유치원 다니던 때가 좋았지”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은 전혀 비웃을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나간 것들을 그리워한다. 모든 선택 뒤에는 선택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이나 후회가 된다. 그때 그 아이에게 문자 한 통 보내 볼걸. 그때 엄마가 해준 반찬을 남기지 말고 먹을걸. 당시에는 옳다고 생각한 선택일지언정 시간이 흐를수록 택하지 않은, 어쩌면 옳았을 수도(혹은 틀렸을 수도)있는 무한한 가능성들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청춘은 하루하루가 그리움이자 원망이다. 일상이 빠르게 변하고,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시는 청춘의 트라이앵글 세 꼭짓점에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을 찍는다. 함부로 다가갔다간 사라질지도 모르는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청춘의 트라이앵글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최승자의 표현은 우리가 흔히 청춘에 대해 물었을 때 나오는 대답과는 다르다.
우리 세대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자기계발서식 충고의 늪에 빠져있다. 어째서 청춘은 아파야하는가. 끊임없이 서로를 채찍질하는 이 시대를 어찌 감히 새싹이 돋아나는 봄의 초입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청춘을 말할 때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청춘은 엿같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으로 온통 얼룩져있다. 이리저리 방랑자처럼 헤매다가 어딘가에 대충 얹혀 살아가는 것이 삶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쭙잖은 위로보다는 이 시처럼 청춘의 지독한 이면을 보여주는 글이다.
청춘은 하나의 낙원과도 같다.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누구도 아름답다 느끼지 않고, 분명 존재한다고 하지만 아무도 본 적 없다. 학창시절에는 대학 잘 가면 끝이라 배우고, 대학에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성공이라 배운다. 그런 가르침은 끝이 없다. 직장에 들어가면 괜찮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해야 하고, 이어 자녀를 잘 길러야 한다. 퇴직 후에는 든든한 노후를 보내야 하고, 죽은 이후조차 근사한 곳에 안치돼야한다.
우리는 평생 끝없는 이상향을 향해 달려간다. 모든 이상향을 묶어 청춘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테다. 청춘의 범위는 법적으로 정해져있지 않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저 ‘곧 청춘이지’, ‘지금이 청춘이야’, ‘아직 청춘이야’를 되뇌다 땅에 묻힌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의 트라이앵글 속에서 무한으로 부딪히면서도 나의 인생이 언젠간 청춘靑春다운 청춘을 맞이하리라 믿는 것이다.
하나의 이상향을 정해두고 경주마처럼 달려가면 무한한 실패만 낳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상향이 아닌, 그저 방황과 외로움을 온전히 끌어안고 사는 것이지 않을까. 진정으로 청춘을 사랑하려면 이 트라이앵글이 곧 청춘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나마 젊은이들이 청춘이라는 이상향의 횡포에 덜 흔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낙원이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