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재즈가 유명한 곳이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 중에는 재즈클럽에 한번 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는데 정작 도착해서는 눈앞에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다 둘째 날 저녁, 퐁피두 센터에서 마티스의 그레타를 만나고 저녁 늦게 시청 앞 대로인 리볼리 거리를 혼자서 넋 놓고 터덜터덜 걸어가던 중 갑자기 재즈클럽 하나가 “나 예 있소” 하며 나타났다. 마치 내 생각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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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지? 재즈클럽 아니야? 들어가 볼까나?”
근데, ”매진: sold out” 이란 푯말이 붙었고 입구는 닫혀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아무도 안나타나 벽에 붙은 공연 포스터 귀퉁이에서 웹사이트를 하나 발견해 핸드폰에 적어두고 호텔로 돌아왔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담날 저녁 일곱 시 반 표는 다 팔렸고 아홉 시 반 표가 남아있어서 바로 구매했다. “낼 가봐야지.”
이틀씩이나 퐁피두 센터에서 멋진 그림들이랑 논다고 정신이 반쯤 나간 덕에 (난 직업이어서가 아니라 타고난 천성이 그림 보는 걸 아주 좋아한다.) 코앞의 재즈클럽을 놓고서도 아홉 시 반 공연시간에 뛰다시피 해서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입구에서 표를 보여주고 기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하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을 따라가니 머리를 조금은 숙여야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고 곧이어 어디서 본 풍경인듯한 작은 동굴같이 생긴 방이 하나 나타났다. 어슴푸레한 기억으로 우디 알렌의 영화 Midnight in Paris에서 본듯한 이곳은 공연장이었는데 무대 젤 앞쪽에는 샛노란 드럼세트가 놓여 있었고 그 앞으로는 접이식 의자들이 나란히 다닥다닥 붙여져 있었다. 정말 몇 평 안 되는 작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마치 벨에포크 시대를 연상시키는 오래된 파리의 꽁꽁 감춰진 지하 아지트 같았다.
“제대로 찾아온 것 맞네.”
사진기를 들고 간 나는 무대를 보고 젤 왼쪽, 젤 앞자리에 위치한 벽에 등을 기댈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진을 찍을 요량으로 일부러 내 뒤에는 아무도 없어 맘대로 카메라를 들었다 올렸다 할 수 있는 곳을 골랐던 것. 자리를 잘 고르고 나니 이래 봤자 사진을 찍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싶은 생각이 들어 허락을 받으러 나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관객들 좌석의 젤 뒤쪽에 트라이포드 위에 카메라를 얹어 놓은 남자가 하나 보였다. 저 양반도 촬영을 하려나보다 생각하곤 다가가서,
“혹시 이곳에서 공연 중에 사진을 찍어도 되나요?”
“당연히 괜찮습니다.“ 의외였다. 기뻤다.
내가 앉은자리는 무척 좁았고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는 건 생각도 못할 정도로 옆사람과 붙어 앉았지만 이게 나에게 주어진 최선이라 생각하고 여기서 할 수 있는 만큼 잘 찍겠노라 마음먹었다. 예정된 아홉 시 반이 되자 깨끗하게 잘 다림질한 스타일리시한 꽃무늬가 적당히 들어간 흰색 포플린 셔츠를 입은 중년의 트롬본 연주자이며 팀의 리더인 Gueorgui Kornazov 가 나와서 인사를 하고 트럼펫, 아코디언, 튜바, 드럼으로 짜인 그의 Brass Spirit Stet의 공연이 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금관 악기라 소리가 너무 크지 않을까 했던 처음의 우려와 달리 볼륨이 적당했고 음색 또한 장소에 잘 어울렸고 라이브 뮤직답게 음악이 살아 움직여 다녔다. 바로 내 코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들의 연주를 들으며 “재즈 음악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미국에 살면서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의 재즈 연주를 들었지만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마음에 드는 연주를 감상한 듯하였다. 그것도 혼자서. 그것도 파리에서…
“역시 파리가 재즈로 유명한 이유가 있었군!“
“이런 게 진짜네.”
특히 아코디언 연주자는 내 바로 앞 일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앉았었는데 그의 어깨너머로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감정을 통째로 전해받는 것 같아 참 좋았다. 그의 혼과 정신이 손가락 한마디 한마디를 통해 손끝에서 튀어나오는 듯한 소리였다. 멋졌다.
공연이 끝나고 백스테이지로 다가가서 그룹의 리더인 Gueorgui에게 좋은 연주 잘 들었다, 고맙다,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에게 혹 연주가 수록된 시디가 있냐고 물어보니 좋아라 하며 가방에서 꺼내 보여준다. 이왕에 여기까지 와서 들은 공연인데 싶어서 한국에 사는 재즈광인 친구 남동생에게도 하나 전해 줄 겸 두 개를 구입했다. (그 친구는 영어로 된 재즈 입문서 세 권을 손수 한글로 번역해 자비로 출판도 했을 만큼 진짜 광팬이다.)
또한 내 사진기를 가리키며 사진파일을 보내줄 수 있으니 이멜 주소를 알려주면 그리하겠다 하니 따로 핸드폰에 적어준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말로 자기들이 한국인 재즈싱어인 나윤선과도 같이 연주를 했었다고 했다.
“아하! 이 친구들이 본인들이 괜찮은 팀이란 말을 한국 재즈 가수와 협업한 경력으로 이야기할 정도로 나윤선 씨의 명성이 대단하구나.”
이젠 재즈의 도시 파리에서도 한국이 그리 먼 나라가 아니었다.
파리를 다녀온 지 벌써 한 달 여가 되어간다. 브런치 연재를 쓰면서 덕분에 그 많은 사진들을 맘먹고 마감시간 맞춰가며 정리해 나가고 있다. 며칠 전 이 재즈 이야기를 써내려 가면서 에디팅 한 사진들을 Gueorgui에게 보냈다. 하루뒤에 받은 답장에 짤막하지만 정중하게 고맙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이제부턴 그들의 연주가 파리에서 나의 “TO DO LIST”에 추가될 것 같았다.
마치 또 다른 버전의 마티스의 그레타 프로조를 만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