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터의 파워는 방대한 자료실로부터…
퐁피두 센터에서의 둘째 날, 첫날은 표가 매진되어서 특별전은 못 들어갔지만, 둘째 날 저녁에 겨우 보았던 ”초현실주의 100년“ 전시는 역시 퐁피두센터다웠다. 여러 나라 미술관을 많이 다녀봤고 각 미술관에서 열리는 특별전도 눈여겨 많이 보았지만 이곳의 전시는 뭔가 모르게 구성이 잘 짜여있고 설명도 어딘지 모르게 달랐고 잘 쓰였다는 생각을 했다. 전시회를 첨부터 끝까지 다 보고 나니 마치 내 머릿속에 “초현실주의”라는 개념은 이런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확실히 자리 잡은 듯했다. 간단명료한 것 외에도 첨 읽는 내용들이 많아서 더 흥미로왔다.
물론 미술학도로서 미술사에 대한 연식은 거의 반세기가 되어가지만 이곳처럼 한 사조에 대한 정리를 명료하고 재미있게 설명해 준 곳은 드물었던 것 같다. 그런 점은 전날 갔었던 오 층에 위치한 상설 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상 사 층의 컨템퍼러리는 대충 건너뛰고…) 오 층에는 1905년대의 그림에서부터 시작하여 1960년대까지의 작품들이 있었는데 각 사조마다의 적절한 그림과 간단명료한 설명으로 정리가 잘 되어있어 오랜만에 현대 미술에 대하여 확실한 복습을 한 듯하였다.
전날 그곳에서 다시 본 마티스의 그레타도 그녀에 대해서 오랜 기간 동안 많이 찾아봐서 어느 정도는 친숙하다 생각했었는데 작품 설명이 쓰인 플라크에는 처음 알게 된 정보들도 꽤 있었다. 특히 그녀의 모습이 “intensly present” 하다는 표현은 첨 읽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주관적인 감상을 손바닥만 한 그림 설명서에 자신 있게 넣을 수 있는 연구자라면 그의 작가에 대한 지식이나 그림을 보는 안목이 수준급을 넘어서 세계적이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학부에서 부전공으로 미술사를 공부했던 아들이 손바닥 만한 그림 설명 한 장을 완성하기 위해 한 학기를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자기가 쓰려는 작가의 전 생애를 꿰뚫어야 그 한 장의 설명서가 간신히 나올 수 있었다 하였다. 근데 이곳의 작품 설명서들은 하나하나 세계적이면서 모두 다 모아 놓으면 잘 꿰인 구슬같이 조화로웠고 아름다웠다.
“왜 그럴까? 왜 퐁피두 센터의 설명들이나 전시가 다른 미술관보다 더 나아 보일까?“
나는 막연히 이곳이 미술관으로만 지어진 곳이 아니라 예술과 문학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설립된 곳이기 때문인 듯하다는 추측을 하였었다. 일종의 예술에 관한 종합선물세트로서 그림만 전시하는 곳이 아닌 전문적인 예술에 대한 자료 수집에서부터 시작하여 리서치, 연구등이 진행되는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을 바탕으로 예술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는 전문인들을 양성하는 소프트 웨어가 형성되어서가 아닐까? 그런 나의 상상은 두 번째 날 칸딘스키 도서관의 존재를 발견하면서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추측성의 정보를 얻게 되었다.
퐁피두 센터의 전시가 남달랐던 이유는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방대한 예술 자료에 있다 생각한다.
이곳은 퐁피두 센터이지 퐁피두 미술관이 아니다. 센터에는 음악이나 연극을 위한 공연장,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사진 전시실,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관, 청소년들을 위한 스튜디오, 유럽에서 가장 큰 예술서적을 판매하는 서점, 일반인들을 위한 도서관, 예술을 전공하는 이들을 위한 방대한 자료실과 함께 별개의 도서관이 있고 유럽에서 제일 크다는 현대미술 상설 전시관은 건물의 사 층과 오 층에 있다. 특별전들은 주로 육 층에서 열리고 가끔 일층에 마련된 갤러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내 오래된 기억에 의하면 삼십 년 전 마티스의 그레타 포스터를 산 곳은 건물의 일층에 위치했었다.
이 거대한 한동의 빌딩 안에는 일반 도서관, 유럽최대의 현대 미술관과 IRCAM (음악과 음향 연구센터) 등 세 군데의 독립기관이 공존하고 있다. 나는 이곳이 다른 미술관과 다른 점이 방대한 자료를 갖춘 도서관에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보통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일반 도서관이고 삼층에 위치한 칸딘스키 도서관은 국립 현대 미술관 소속으로 관람 허가를 받은 특정 연구진들에게만 개방된다는 것을 이번에 첨 알았다.
나는 사십 년 전 미국에 첨 유학을 와서 시카고 소재 일리노이 공과대학 디자인 스쿨의 대학원 과정에 입학했었다 - Institute of Design, 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 ID, IIT 그곳은 칸딘스키가 교수로 재직하였던 세계 최초의 현대적 의미의 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의 미국판으로 당시 그와 함께 독일에서 활동하던 교수들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설립한 뉴 바우하우스가 전신으로 후에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건축과 디자인 대학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는 칸딘스키가 젊은 시절에 제작하였던 유명한 Improvisation Series 중 하나인 Improvise No. 30가 소장되어 있다.
그때는 칸딘스키가 누구인지 자세히는 몰랐으나 그림의 화려하고 밝은 색상, 구상과 추상사이에서 자유롭게 표현되었던 작품이 그냥 좋아서 미술관에 갈 때마다 찾아보았다. 그는 추상화의 선구자로 불리며 미술과 음악을 처음으로 접합시킨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런 나에게 퐁피두 센터에서 마주한 칸딘스키 도서관은 그 이름 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왔다. 그래서 초현실주의 전을 보고 재즈클럽에 가는 길에 참새 방앗간 들리듯 살짝 발걸음을 돌려 무턱대고 그 도서관을 찾아갔다. 불행히도 입구에서 입장 불가라 돌아 나와야 했지만 (special permit - 특별 허가증 - 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곳의 사서와 잠깐 나누었던 대화에서 퐁피두 센터에 대해, 프랑스 국립 현대 미술관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우선, 현대미술관의 도서관 이름이 칸딘스키 도서관이 된 이유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미망인이었던 니나 칸딘스키가 남편인 바실리 칸딘스키에게서 상속받은 방대한 컬렉션 - 그의 작품, 스케치, 서신들, 책, 사진 - 등을 퐁피두 센터에 기증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칸딘스키는 러시아인으로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독일에서 법학자로 교편을 잡고 그 대학에서 18년 동안 가르치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한 1914년에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가 몰락하는 시기인 1920년에 다시 독일로 이주하였다. 다시 찾은 독일에서 앞서 말한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수진의 한 사람으로 1922부터 1933년까지 재직하였다. 이때가 칸딘스키의 생애중 가장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한 시기였다 한다. 이후 나치의 강압으로 바우하우스는 폐교되고 교장이었던 월터 그로피우스와 화가이며 사진가였던 라슬로 모홀리 나지, 건축가로 유명한 미즈 반 데 로에 등 많은 교수들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칸딘스키는 그는 부인인 33세 연하의 니나와 파리로 이주해서 활동하다 1944년에 파리에서 작고하였다.
현대 예술이란 것 자체가 미술뿐 아니라 음악, 연극, 시 등을 혼합된 장르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방대한 자료를 가진 칸딘스키 도서관은 프랑스 현대 미술관에서 특별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한다. 사서는 나에게 그 도서관을 사용하려면 이 분야에 타당한 연구원으로서 하가를 받아야만 가능하다고 했는데 아마도 논문을 쓰거나 할 때 지도교수나 관련 기관의 추천서 등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 싶었다.
브레통 (Simon Breton) 은 초현실주의의 창시자로 불린다.
초현실주의로 유명한 마그릿트의 1954년에 제작된 이 그림이 얼마 전 나의 사진 워크숍에서 제자와 선생으로 만났던 Todd Hido가 찍은 사진들과 매우 비슷하다 생각했다. Todd Hido는 세계적인 사진가로 그의 작품 가격은 생존하는 사진가들 중 가장 비싼 그룹에 속한다 (크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리미티드 에디션 사진 한 장에 이 삼만 유로 정도로 알고 있다.)
이 정도의 그림은 당시에는 파격적이었지만 지금은 AI가 단숨에 그려낸다. 재봉틀과 우산은 그림을 낯설게 (뜬금없게?) 만들어주는 이유로 초현실주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다고 한다.
사진에서 왼쪽 아랫부분의 배 나온 아저씨는 전시장에서 내가 사진을 찍을 때 렌즈 앞을 지나가시던 분이 우연히 같이 찍힌 것이다. 나도 생각지 않게 초현실주의 작품에 관여한 듯 여겨졌다.
초현실주의 백주년 기념 전시회는 특별전답게 방대하였고 뜬금없는 이미지들이 여기저기 난무하였다. 어찌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재미있었다. (이건 내 생각)
전시장에서 곁으로 눈이 갔었던 것은 그림을 감상하던 관객들의 모습이었다. 특히 패셔너블한 파리의 젊은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껏 멋을 내고 새로 사귀는 듯한 남자친구와 미술관에 온 아가씨는 그림 보는 내내 연애하듯 그림 얘기를 하고 있었고 한편에는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까만 머리의 키 큰 귀여운 백인 아가씨는 같이 온 남자친구 두 명과 연신 장난을 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우습기도 귀엽기도 했고 그들의 행동이나 옷차림등이 예사롭지도 않아 사진을 한컷 찍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게 보여 여학생인 Eva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이게 내가 찍은 네 사진이야. 좀 전에 한 것같이 반대편 방으로 돌아가서 저기 뚫린 벽사이 공간으로 얼굴 좀 내밀어볼래? 내가 그런 너의 모습을 다시 한번 제대로 사진으로 담고 싶어서 그래.“
“오케이. 뭔 말인지 알겠어.“
그녀는 내 말대로 방금 지나온 방으로 다시 가서 포즈를 취해주었다.
“찰칵!”
Eva에게 본인의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보기에 백 년 전의 초현실주의가 지금의 사진 작업이나 AI가 그려내는 이미지들과 많이 닮았다고 하였더니 대뜸,
“초현실주의가 이해받기까지 백 년이 걸렸지요.” 한다. 오호? 이 친구 보통은 아니네. 고등학생이나 대학 초년생 같이 보이는데…
“맞아. 사실 스트라빈스키의 Rite of Spring (봄의 제전) 역시 제대로 평가받기까지 백 년이 걸렸잖아? 시대보다 앞서 가는 예술이 뒤따르는 대중에게 스며들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아.“
“맞아요.”
나보다 사오십 년쯤 어려 보이는 그녀와의 접점을 찾는 순간이었다. 관객인 우리들 역시 초현실주의와 같이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서로에게 고개를 내밀고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이들과 재미있게 사진을 찍고 돌아 나오는 길에 책방에 들렸다. 그곳에서 젊은 시절의 쟈코메티와 그의 노년의 모습이 한 권의 책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21세에 파리로 이주했던 스위스 출신의 쟈코메티도 한때는 바로 전에 만났던 파리의 젊은이였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프랑스가 유럽에서 아니 세계에서 문화제국이라고 으스대는 이유 중 하나는 지난 세기에 파리라는 도시가 칸딘스키나 쟈코메티, 샤갈, 피카소와 같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모인 아티스트들의 용광로와 같은 구실을 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들 중 많은 작가들이 이곳에서 표현의 자유를 찾았고 성공했고 유명해졌고 타당한 경제적 보상도 받았었다. 그에 더 해서 지금의 퐁피두 센터와 같이 그들의 문화적 유산을 수집하고 보관하고 연구하는 시스템이 잘 세워져 있어 다양한 장르에서 축적된 지식들이 Eva와 같은 현대의 젊은이들에게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여전히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힘은 멀리서부터 여행온 나와 같은 보통의 외국인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물론 그 유산들 중에는 약탈된 이집트의 로제타 스톤뿐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조선의 의궤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니나 칸딘스키와 같이 자발적으로 기증한 자료들이 엄청날 것이라는 생각에 주목이 갔다. 퐁피두 센터의 전시가 다른 어느 곳보다 일목 요연하게 내 머리에 쏙 들어왔던 이유는 그런 풍부한 토양 때문이 아니었을까?. 역사를 보존하고 이어나가는 숨은 힘은 예술의 발자취를 지켜나가겠다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 덕분이 아니었을까? 칸딘스키에게는 그의 컬렉션을 지켜준 니나라는 부인이 있었다는 것이나 고흐의 명성에는 그의 형 테오의 미망인이었던 요한나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이들 모두가 여인들이었다는 사실이 조금씩 흥미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 역시 한 여인으로서 그녀들의 숨겨졌던 활동들에 좀 더 주목하고 싶어졌다. 국경과 시대를 넘어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왜 여자들만 음지에서 이런 일들을 할까? 적극적으로 표면에 나서서 남자들과 어깨를 겨루며 일한 여인들은 과연 그렇게 소수일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