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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구름 May 16. 2023

아름다웠던 교직생활 23년

교단일기2. 23년 돌아보기


2. 아름다웠던 교직 생활 23년을 돌아보며


 1999년 8월 18일.  나의 첫 발령일이다.  

생각해 보면 첫 발령인 수원 화서초등학교의 교무실에서 첫인사를 하던 기억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23년이란 시간이 지났다니 참 시간은 쏜 살과 같이 지나는 듯하다. 어떤 사람이든 저마다의 역사가 있겠지만 학창 시절을 제외한 나의 역사에 대하여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 기억을 더듬어 나의 생활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교대.  나의 진학 목표에는 있지 않았던 학교였지만 고 3 때 담임선생님과의 진학상담 시 바로 앞 상담했던 친구 덕에 선생님의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교대 설명자료를 보고는 어머니와 나는 교대를 가기로 결정하고 마지막 학력고사를 보고 인천교대(인천교육대학교-후에 경인교대로 교명이 변경됨)라는 곳에 합격을 하게 된다.

  교육대학교 4년도 마치 고등학교와 같은 빡빡한 커리큘럼 속에서 저마다 교사라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였고 4학년때는 나름 열심히 사법, 행정, 임용, 3대 고시 중 하나라는 임용고시를 보고 경기도 교육청 초등교사 임용 합격을 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1997년 2월 경인교대를 졸업하자마자 학군단이었던 나는 24명의 학군단 동기들과 함께 빛나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장교로 임관하게 되었다. 다행히 경기도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임관을 하게 되어 부담없이 2년 6개월간의 장교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젊은 청년 장교로서 부푼 꿈을 안고 나의 첫 사회생활로 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병과 중 정훈공보 병과였던 나는 지금은 MBC, JTBC등 방송국들이 즐비한 수색동의 국방대학교 산하 국방정신전력원에서 3개월간의 초군반 입소교육을 받으며 정훈공보장교로의 교육을 받고 목포에 있는 해안 대대로 자대 배치를 받게 된다.  당시 해안 대대의 소초 및 격오지 부대에서 만연해 있던 소대장 길들이기 등 병사가 초급 부사관이나 초급 장교들에게 하극상을 하는 일들이 일어나자 장병들의 정신교육을 강화하여 그러한 부조리를 없애기 위해 전방 GOP소대나 해안 경계 격오지 부대등에 대대급 정훈공보장교를 배치하였는데 그러한 임무로 나도 해안 레이더기지나 해안 초소등에 순회 교육을 하는 정훈장교 역할과 지역사회의 대민 업무, 공보업무를 하는 공보장교 역할을 하며 군생활을 하게 된다.

 대학교 졸업 후 첫 사회생활을 군생활로 하다 보니 상명하복의 문화에 바로 적응하게 되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군생활을 하며 부대 지휘관 및 선배 장교들에게 인정받으며 무사히 전역을 할 수 있었다.

  

 군 생활을 마치고 군기가 미처 빠지지 않은 예비역 중위였던 나는 경기도교육청 임용 합격 후 군 입대를 했기 때문에 발령 유예를 하고 있었던 중 군 전역과 동시에 신규 교사로 발령이 나게 된다. 첫 발령지는 수원에 있는 화서초등학교.  화서초는 그 당시 46 학급정도 되는 무척 큰 규모의 학교로 교장선생님과 두 분의 교감선생님께서 근무하시면서 싹 틔움 교육과정으로 전국단위 100대 교육과정 최우수교로 뽑힐 만큼 열심히 하는 학교였다.   나는 중간발령이었기에 1학기를 마치고 명예퇴직을 하시는 2학년 선생님의 뒤를 이어 2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다.  교육경력이라고는 교생실습이 다였던 나는 현실로 다가온 2학년과의 첫 수업에서 멘붕이 올 수밖에 없었다.  부대에서 백여 명이 넘는 장병들을 인솔하거나 교육시켰던 것과 달리 저마다 신나는 2학년 아이들과는 그 차이가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첫 교사로서의 좌절을 맛보게 된다.   2학년 친구들은 많은 경력으로 아이들에게 신경 써 주셨던 전 담임선생님과 달리 목소리만 큰 어리숙한 담임선생님이 참 만만했던 것 같다.  매 시간마다 아이들과의 전쟁이 딱 맞는 표현이겠다.  “@@가 때렸어요.”, “친구들이 놀려요!”, “ 선생님, 화장실 다녀오면 안 돼요?”, “아저씨는 누구세요?”라는 아이까지 나의 첫 아이들은 그렇게 나에게로 왔다.  그래도 훌륭하신 동학년 선생님들 덕에 2학년을 잘 마무리하고 이후 젊은 남 교사가 적합한 6학년을 내리 2년을 하게 되었다.  물론 2학년 담임보다는 훨씬 말이 통하고 소통하며 지도할 수 있었던 아이들이지만 통합 학급 친구와 함께 40여 명 가까이 되는 학급을 운영하기는 만만치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어려운 과정에서도 동학년 선생님들과의 소통과 나눔이 그 당시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신규 교사였을 때 답답했을 선배 교사들의 고충을 이제야 이해가 조금 되는데 지금의 나는 이제 선배 교사가 되어 후배들에게 어떤 선배가 되고 있는지 반성을 하게 된다.

 첫 학교에서의 마무리를 결혼이라는 이벤트로 마치고 2년 반 만에 신혼집이 남양주에 있었던 관계로 남양주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는데 남양주 양정초등학교라는 두 번째 학교로 가게 된다.  남양주 양정초등학교도 꽤 규모가 있는 학교였는데 이 학교의 특징이 딱 학년별로 한 명씩 있을 정도로 남교사가 적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학년 배정의 원칙이 학교의 남자교사를 학년에 하나씩 배치 후 다른 선생님을 배치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 그렇게 근무하던 다섯 명의 남교사들은 같이 동학년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맞게 각 학년으로 찢어져 생활했는데 다들 열심히 살았던 그때의 독수리 오형제 선생님들은 벌써 다들 승진하시고 교장, 교감이 되어 있으시다.  그때 있었던 남자 다섯 명 중에 나도 이제 내년이면 교감이 된다 하니 참 세월이 빠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도 항상 우리들을 잘 이끌어 주신 선배들 덕에 이런저런 일들을 배우며 고학년을 지도하면서 지내게 되었는데 이 당시에 처음으로 학교운영위원도 해보고 남양주 체육을 주도하던 선배들 덕에 축구대회, 씨름대회, 육상대회 등 다양한 대회 경험도 쌓게 되고 체육교육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양정초의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는 내가 양정초에 부임한 때는 2002년이었는데 그 당시 내가 한 두해만 일찍 양정초로 갔더라면 아시아의 별이라고 불렸던 보아의 담임을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보아가 아시아의 별이 되기전 열심히 가르쳐 줄 수 있었는데 아쉽다.


  두 해를 남양주에서 보내고 새로운 집으로의 이사로 인해 여주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결혼 후 첫 아이를 남양주에서 갖게 되고 아이들의 교육과 삶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연과 함께 키우고 싶기도 하고  교사로서 시골에서 조용히 사색하며 생활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경기도의 오지(?) 여주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여주에서의 첫 학교는 가남초등학교. 여주에서는 규모가 있지만 여주 시내에 살았던 나에게 가남초는 외곽 지역이라 길도 그리 좋지 않고 다니기도 약간은 불편한 학교였다. 하지만 좋은 선배들을 만나 여러 가지 배움도 있었고 열심히 사는 선배들 덕에 연구대회라는 좋은 경험도 하게 되었다.  처음 도전한 인성교육연구대회에서 1등급이라는 좋은 성과도 얻게 되어 나름 보람찬 학교생활을 하게 된다.  또 이때에는 중학년인 3, 4학년을 맡아 담임을 하게 되면서 아이들과의 소통이라는 작은 행복을 알게 되었고 교사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소중한 경험도 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만났던 선배 선생님들이 있지 않았다면 나의 현재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선배들을 만나게 된 이때가 나의 생각의 폭을 무척 넓게 만들어 준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 이 당시 남친회가 아주 조직력 있고 중요한 모임이었는데 그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뜻대로 즐기며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은 조금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도 많은 영감을 주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학교라 기억이 남는다.  이 당시 같은 학년의 학년 부장을 하셨던 손 선생님은 평소 여유 있는 모습과 선후배를 아우르며 편안하게 만들어 주시는 모습으로 본 받을만한 분이셨는데 교감, 교장으로 승진하시고 수원에서 근무하시던 몇 해전 갑작스러운 병마로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어서 참 가슴 아팠다.  또 이 당시 정보 계원으로 업무를 맡았을 때 정보부장을 한 김 선생님은 새로운 배움과 컴퓨터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으로 여러 가지 도움이 되었고 학교를 옮기고 나서는 새로운 학교에서의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게 도움이 되어 인생에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성남에 있는 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하시면서 여주에 있는 작은 농막과 텃밭 꾸미기를 재미 삼아 지내시고 있지만 가끔 만나 예전 이야기를 하면 하루 반나절이 금세 지난다.


 가남초에서 첫 번째 옮긴 학교는 연라초등학교.  집과는 이전 학교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던 작은 여섯 학급의 첫 학교였는데 아이들도 그렇고 학교생활도 편안하고 무탈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도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을 만났었는데 나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나를 인정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던 교장선생님과 멀리 파주에서 첫 교감선생님으로 오셨던 모 교감선생님, 교무, 연구부장 선생님들이 학교에서의 일들을 어떻게 해나가는지를 알게 해 주셔서 부장이라는 것에 부담을 갖지 않고 도전하게 만들어 주셨던 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승진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금당초로의 전출이 또 다른 시작을 가져오게 된다.


 가남초에서 함께 근무했던 김 선생님이 교감으로 승진하셔서 금당초에 근무하게 되었고 마침 금당초에서 근무할 새로운 선생님들을 찾던 중 가남에서 정보부장이었던 김 부장님을 교무부장으로 불러들이고, 나는 처음 연구부장이라는 직책으로 금당초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름 연구통으로 불리셨던 김 교감선생님은 교사들에게 항상 연구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셨고 그 시작을 도와주고 지원해 주어서 다양한 연구에 도전할 수 있게 해주셨다.  이 당시 학교에는 초등학교 입학한 큰딸과 유치원 다니는 둘째 딸을 내가 데리고 다니게 되었는데 이때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등하교했던 기억은 지금도 참 행복했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아침마다 바쁘게 차에 타고 함께 출퇴근하며 아이들과 나눴던 대화가 지금까지도 별 탈 없이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준 아이들이 되는데 바탕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금당초는 여섯 학급의 작은 학교였지만 학생 수가 적어 항상 다른 지역의 학생들을 섭외하느라 고생이 참 많았는데 스쿨버스로 아이들을 태우고 오는 일들 때문에 겨울 눈이 많이 온날 스쿨버스가 언덕을 못 올라와 선생님들과 교직원들이 그 버스 구출을 위해 노력했던 일, 학교 홍보에 노력했던 일등이 생각이 난다.  또 이 당시 학교와 지역사회와 연계가 참 잘 되었고, 마을과 함께 하는 학교가 되도록 노력했던 점이 좋았다.  지역 사회의 지도층이 학교와 다양한 고민을 나누고 해결해 나가는 동반자였다는 점이 어쩌면 정말 혁신적인 혁신학교였던 것 같다.

 여기 연구부장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담임이 아닌 전담교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체육관도 없는 학교에서 3,4,5,6학년의 체육과 과학 수업을 하면서 참 즐겁게 지냈다.  나름 전담으로서의 자유(?)도 느끼면서 내가 생각하는 교육이 어떤 모습인지,  내가 생각하는 교사란 어떤 교사인지에 대하여서도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때 내 아이들을 함께 가르치고 학교에서의 생활을 같이 한 것이 나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고 기억이다.  지금은 여주에서도 가장 작은 학교가 되어 존폐위기에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서 참 안타깝기도 하지만 작은 학교가 가진 상징성과 지역사회에서의 의미를 생각하면 작은 학교를 없애는 것보다는 마을과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금당초에서 4년을 그렇게 행복하게 보내고 마지막 1년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도 행복한 시간인 연구년을 하게 된다.  그 당시 나는 체육전담교사를 하고 있었기에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체육과목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공부도 많이 했었는데 서울대 체육교육학 박사를 하고 있었던 동기의 여러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수업도 해보고 연구도 해보면서 연구년이라는 나를 위한 일 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교사라는 시간을 되돌아보고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연구년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야 할 시기에 또다시 학교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나는 연구년을 하였던 내용을 바탕으로 북내초라는 곳에 초빙교사로 가게 된다.

 북내초에서 4년을 초빙교사로 근무하면서 정말 내가 해보고 싶은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다양한 스포츠클럽을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체육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또 학교체육, 스포츠클럽, 뉴스포츠, 놀이교육등에 대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 왔던 시간이었다.  그 4년의 시간 동안 학교와 학부모님, 학생들도 나의 노력들을 인정해 주었고 나는 또다시 재초빙을 받아 4년을 더 근무하게 된다.  그동안 스포츠클럽활동을 통해 전국대회까지 나가 전국 8강에 들어보기도 하였고 여주지역 대회 우승,  미니 플로어볼 대회 전국우승 등 다양한 활동을 정말 원 없이 해본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던 8년을 마치고 지금의 도전분교장으로 이동하여 드디어 교감 연수 차출이 되었고 22년에 교감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던 23년의 시간이 있었기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었고 내 생애 즐겁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교육경력 23년이 지나고 있는 요즘이지만 아직도 수업은 어렵고 아이들과의 소통은 더 어렵다. 하지만 아이들과 관계에서 교사로서 나의 진심이 전달되고, 바르고 참된 인간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나의 소망이 아이들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 요즘은 참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주에 온 지 내년이면 20년이니 나에게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고 여주라는 곳에서의 삶이 나름 평안한 삶이었기에 (때론 치열하게 살기도 했지만) 만족하면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그중엔 가족뿐만 아니라 여주의 아이들과 여주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름다웠던 23년은 오늘도 그렇게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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