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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사람 Feb 02. 2021

아무런 조건 없이 받은 사랑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동생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안부 전화를 해온다. 재작년 전까지만 해도 동생 연락의 반은 용돈이 떨어졌을 때 왔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목적형 안부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요즘은 정말 '그냥' 전화를 하는 것이다. 엄마, 아빠에게도 식사는 하셨냐는 인사를 자주 드린다고 한다. 영원히 철이 없을 것만 같던 동생의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보여서 기특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은 전화가 오더니 학교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엉엉 울었다는 것이다. 다 큰 남자애가, 체면을 꽤 중요하게 차리는 애가, 전날까지도 별 일이랄 게 없어 보였던 애가 집도 아닌 데서 울었다고 하니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인지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니 할머니 생각이 나서 그랬다고 한다. 원래 할머니께 전화를 드리며 학교를 갔었는데 그때가 생각나서,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펑펑 울었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는 벌써 해포가 지났다. 아직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연말 시상식을 보고 있다가 들은 소식. 다음날 할머니를 뵈러 갈 계획이었어서 하루만 참아주시지 하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상황이 안되었던 거지만 미리 가지 못한 나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이 땅 모든 생명은 세상과의 이별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소리를 남긴다. 할머니의 소리는 기쁜 노래였다. 마지막 모습이 담긴 영상 속에서 할머니는 힘이 없는 그 순간까지 흘러나오는 찬송에 손짓으로 지휘를 하셨다. 처음에는 목소리로 하다가 안되니 몸짓으로, 나중엔 그것도 힘들어지니까 손가락으로 까딱까딱하신 것이다. 평소에 음악을 좋아하셨던 할머니는 하늘나라에 있는 반짝반짝한 무대에서 멋지게 노래를 부르고 계실 것 같다.


 어릴 때부터 헤아릴 수 없는 경험으로 바른 길을 알려주셨던 나의 최고의 선생님은 가시는 길에서도 큰 깨달음을 주셨다. 가족들과 조문을 오는 손님들은 모두 할머니를 온유와 자애로움, 이 두 가지 단어로 표현하고 있었다. 빈자리에서조차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고 계시다는 것이 너무나 느껴지는 장례식이었다. 부럽기까지 했다. 나도 나중에 그런 삶을 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다짐이 들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웠던, 특히 아랫사람에게 도타운 사랑을 베풀었던 그런 사람.




 할머니는 걱정을 많이 하시는 분이었다. 내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댁에 가면 돈이 없어서 그것만 입고 다니느라 바지가 해졌다고 생각하신 건지 바지  입으라고 용돈을 주셨다. 건장한 남자 동생들끼리 팔씨름을 하려고 하면 그러다   쓴다고 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셨고,  건장한 남자 동생들이 의자 따위의 물건을 가까운 거리  옮기려고 하면 허리 다친다고 나이 드신 본인이 하려고 하셨다. 자식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그게  시간이 걸리든, 그게 밤이든 새벽이든 전화기 앞에서 우리의 연락을 기다리셨다. 약간은 과하다고 생각될 만큼 할머니는 우리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다. 자연스럽게  걱정들은 우리가 할머니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있음을 느끼게  주었다.


 특히나 옛 어른들은 장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 할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게 내 동생인 것이다. 가끔씩 질투가 날 정도였다. OO 이는 우리 집의 호프(hope)다 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렇게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동생은 더더욱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클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잊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그런 아가페적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다는 사실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이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가페는 신이 인류를 위해 품었던 사랑이기도 하다. 그 사랑은 너무 커서 천체를 뒤흔들었고,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고독했던 한 사람의 생이 세상의 왕들과 군대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 사랑을 경험해본 사람은 이 세상에 사랑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할머니는 그런 위대한 유산을 남겨 주셨다.




 동생의 전화 한 통으로 늘 그리워는 하지만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던 생각을 꺼내 보았다. 아직 나뭇가지엔 상고대가 끼어있는 추운 날씨지만 할머니를 추억하니 따스한 기운이 든다. 아무런 대가 없이 받기만 한 할머니의 사랑 덕분에 그런 따뜻한 기분이 드는 걸 것이다. 때로는 소녀같이 수줍게 노래하고 춤추셨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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