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어둑해진 밤하늘 아래로 낮처럼 밝은 딸기 비닐하우스 안.
유운은 얼떨결에 콩쥐가 되어서 윤오 대신 딸기 수확 할당량을 채워가고 있었다. 그녀가 온통 흙냄새와 딸기 향으로 뒤덮인 드넓은 공간에서 짙은 초록색 줄기에 달린 빨갛게 익은 딸기 한 알을 똑 떼서 빨간색 소쿠리에 담았다. 오늘의 마지막 딸기였다.
한참 만에야 허리를 펴서 겨우 기지개를 켜자 앓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아. 죽는 줄.”
그녀가 굽었던 허리를 연신 주먹으로 두들겨 대며 비닐하우스에서 걸어 나오자, 밀린 일 때문에 바쁘다며 사라졌던 윤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양팔을 얽어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며 싱긋 웃곤 수고했다고 말하는 그 얼굴이 낮처럼 환해서 얄밉기 그지없었다.
밖은 토요일의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짙은 남청색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운은 밤하늘에 뜬 달을 영혼 없는 눈으로 바라보곤, 힘없이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기운이 쏙 빠져선 창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윤오가 그런 운을 힐긋 곁눈질했다.
“힘들어?”
그녀가 당연한 물음에 그만 어이가 없어져 입을 작게 벌린 채 헛웃음을 쳤다. 그렇게 잠시 윤오의 옆 모습을 가만히 쳐다만 보다가, 미간을 구기며 느지막하게 대꾸했다.
“말이라고 해? 이 사기꾼…….”
“난 못 탄다고 한 적 없다니까. 그러니까 내기는 신중히 해야지.”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사행성 도박 같은 거 좋아하면 큰일 나. 그렇게 떠들어대는 윤오의 입을 찰싹 때리고 싶었지만, 운은 꾹 참고서 지친 몸을 조수석에 반쯤 뉘일 뿐이었다.
“아무튼. 유운, 수고했어.”
김윤오의 환히 웃는 얼굴이 제게 한 짓이랑은 다르게 친절했다. 괜히 화도 못 내게.
“네가 대타해 준 덕분에 밀렸던 일도 다 끝냈어. 고마워.”
어쩌다 말도 안 되는 동네 친구라는 이름으로 엮여선.
운은 이제 그에게 화낼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음을 깨닫곤, 그대로 대꾸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딸기 비닐하우스와 운의 집은 차로 30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적막한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의 시골. 이곳의 좁은 도로를 달리고 있는 건 윤오의 차 하나뿐이었다.
그는 조수석에서 앉은 운이 힘없이 창가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은 모습을 슬쩍 훔쳐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 완전히 방전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윤오는 저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에 비친 운은 생각이 너무 많아 보였다. 가끔 보이는 생각에 잠긴 눈은 정말이지 생기라곤 한 점도 없어서, 이곳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라리 몸을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사람은 가만히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각과 고민이 늘어나니까. 자신도 그랬으니, 운을 보면 자신의 초상을 바라보는 기분이라 가만히 둘 수가 없는 건가.
하루 끝에 찾아온 피로 젖은 노곤함에 운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가 슬쩍 눈을 떴다.
차 안은 어두웠고, 고요했다. 오랜만이었다. 타인과 공유하는 적막이 편안한 것은.
그녀가 가늘게 눈을 뜬 채 고요함이 감도는 동네의 야경을 응시하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근데, 나 뭐 좀 물어봐도 되나.”
자는 줄로만 알았던 운의 목소리에 윤오가 반문했다.
“자는 거 아니었어?”
“그냥 피곤해서 잠깐 눈 감은 건데.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 잠들어서 뭐 해.”
“그렇긴 하지.”
그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대꾸했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
장난스럽게 되묻는 그 말에 운이 무심코 질문을 내뱉었다.
“스케이트는 왜 관뒀어?”
툭 내뱉은 물음에 그답지 않게 한 박자 늦은 대답이 들려왔다.
“그땐 좋아하는 일이 싫어지는 게 겁났어.”
그가 장난스럽게만 말하던 평소 같지 않았다. 운은 그 모습이 어쩐지 어색했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남들보다 못하는 걸 안 순간. 그게 싫어질 게 뻔해서. 어린 마음이 컸지. 뭐, 다시 돌아간대도 그만뒀을 거 같긴 하지만.”
윤오는 자신에게 친구를 하자고 했지만, 사실상 서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어쩌면 그냥 지나가는 동네 사람보다도 더.
그가 그녀에 대해 지나가는 말을 주워듣고 알고 있을지 몰라도 운은 아니었다. 문득 적막함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이 길었다. 운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곤 말을 골랐다.
“그나저나 자전거 도둑은 잡았대?”
화제를 바꾸는 듯한 말에 윤오가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면서 대꾸했다.
“아직인 거 같지. 아무래도 외부인 같으니까, 너도 저녁에 문단속 좀 잘하고.”
“난 훔쳐 갈 것도 없어.”
“그렇긴 해.”
픽 웃으며 하는 말과 동시에 운의 집 앞에 도착한 차가 멈추어 섰다.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귀찮게 안 불러낼게. 푹 쉬어.”
운도 바라던 바였는지, 굳센 얼굴을 하곤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한 번 끄덕였다. 윤오는 그 솔직한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다행히 이전처럼 잡을 벌레는 없는지 운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문을 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유운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실내 난방을 켜고, 겉옷을 벗어서 아무렇게나 던져두고서 바닥에 대(大)자로 누웠다.
곧 보일러를 튼 바닥이 빠르게 데워지며 차가웠던 운의 몸을 데웠다. 운은 종일 스케이트장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저녁에는 딸기를 수확한 탓인지 몸이 노곤했다.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제 몸은 바닥에 축 늘어진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지금이 8시니까, 딱 30분만 자고 일어나고 싶었다. 그만 썰물처럼 밀려드는 수마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딱 30분만 자고 일어나야지.
그렇게 눈을 떴을 땐, 딱 8시 반이었다. 운은 겨우겨우 스스로 타일러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크게 기지개를 켜고서, 불현듯 생각 난 낮에 마당에 내놓았던 의자를 들여놓으려고 현관을 나섰다. 그때.
끼익.
커다랗고 기이한 쇳소리에 순간 현관문을 연 운의 손이 움찔했다.
“……잘못 들었나.”
운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는 듯 다시금 끼익하고 듣기 싫은 쇠붙이 소리가 들렸다. 일순간 윤오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아직인 거 같지. 아무래도 외부인 같으니까, 너도 저녁에 집단속 좀 잘하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저번에도 그리고 오늘도. 자신이 대문을 닫지 않고 갔던가. 순간 팔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그녀는 어느샌가 윤오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전신을 훑는 두려움에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조금 오버 같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깜빡하고 대문을 닫지 않고 갔던 것 같기도 하고.
평소에도 잠깐씩 집을 비울 때면 현관문은 자동으로 잠기니까 굳이 마당의 대문까지 걸어 잠가놓진 않고 닫아놓기만 했었다. 그러니 바람결에 대문이 혼자서 열린 것일 수도 있지 않나?
고작 쇳소리 좀 들은 거 갖고 지레 겁먹고선, 괜히 집에 도착해서 쉬고 있을 사람한테 다시 전화해서 불러내는 것도 민폐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리 판단한 운이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 어, 왜?
윤오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넘어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운은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한 사람을 이런 일로 불러내기엔 역시 오버 같았다.
“아니……. 그냥 집에 잘 도착했나 싶어서.”
-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일 있을 게 뭐가 있어. 잘 도착했다니까 됐어.”
그래, 잘 쉬어. 그녀가 대충 통화를 마무리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버리려고 바깥에 내어놓았던 커다란 무쇠 프라이팬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냥 바람 소리였나.”
운이 마당과 그 주위를 한참 두리번거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제 생각대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거세서 마당 문이 소리를 냈던 건가. 한참 마당을 서성이던 운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끼익. 끼익. 부스럭.
꽤 오랫동안 방치된 마당 옆의 허름한 창고. 운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딱 한 번 열어보고 그 뒤론 딱히 쓸 일이 없어 관리하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바람 아니, 동물 소린가. 운은 찝찝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어 이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이나 제대로 잠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아, 그려. 마지막 집이여.”
창고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후한 남자의 낯선 목소리에 심장이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운이 설마하며 최대한 기척을 줄이고서 창고 문 가까이 다가갔다.
살짝 열린 창고 문 너머로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운은 그만 제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하지만 한쪽 손에 든 프라이팬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손에 힘을 주었다.
“얼른 끝내고, 술 한 잔 혀야지. 그리고 이제 주인집도 들어가 봐야제.”
문틈 너머로 흉기처럼 생긴 커다란 쇠붙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나.
그녀가 뒤늦은 고민을 하며 제자리에 굳어있었다. 이윽고 다시 문틈 너머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려, 여기 젊은 아가씨가 혼자 살더라고.”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해.
그녀가 소리 없이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차가운 겨울바람이 왈칵 들이닥쳤다. 덕분에 살짝 열려있던 창고의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고, 찰나 그 안의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