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를 가는 데만 집중했던 운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질 못 했는데, 윤오가 어느샌가 와서 맞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 얼마나 집중했길래,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몰라?”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윤오가 고개를 가볍게 갸웃하곤, 그녀가 돌리고 있던 원두 그라인더를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핸드드립 하게?”
“그러게. 오랜만이네.”
그의 말대로 핸드드립 커피는 오랜만이었다. 생각이 많아질 때면 핸드드립을 내리길 좋아했다. 한참 집중해서 잘 볶아진 원두를 잘게 가루 내는 일을 할 때면, 어지럽게 널브러진 수많은 생각들도 잘게 갈려 나가서 머릿속이 말끔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으니까.
순간 시선을 돌리자, 윤오가 테이블에 올려둔 납작한 회색 노트북이 보였다. 회색 노트북 위로 와펜 같은 여러 스티커가 규칙 없어 보이면서도 조화롭게 붙어있었다.
운은 문득 그에게 카페인과 단것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핸드드립이랑 크로플 먹을래? 늦잠 자서 다른 건 준비 못 했거든.”
“좋지. 그나저나 숙취는 잘 풀었어?”
“……덕분에.”
그가 픽 웃으며 말하곤 카드를 내밀자, 그녀가 됐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건 어제 민폐 값이라고 생각해. 오늘은 내가 살게.”
“뭐, 그러든지.”
그는 딱히 거절할 생각은 없다는 듯이 내밀었던 카드를 뒤로 물렀다.
“어제 너 데려오느라 힘들긴 했거든.”
다 큰 어른을 업고 가는 게 얼마나 힘들던지. 그는 일부러 그녀를 놀리려는 듯 그 이야기를 곱씹듯 덧붙였다. 운은 약하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또다시 다짐했다. 당분간 술을 멀리해야겠다고.
“그리고, 하나 더.”
윤오가 제자리로 돌아가 앉곤, 유운을 반듯하게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일 고마우면, 나 좀 도와.”
다 갈아낸 까만 원두 가루를 거름종이에 쏟아부은 운이 그를 바라보며 무슨 말이냐는 듯 옆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윤오가 빙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은혜 갚는 까치. 그거 하라고.”
***
운의 주말은 누구보다 평화로울 예정이었다. 지난주에는 나름 대량으로 사둔 딸기와 레몬, 자몽을 차례로 청으로 담느라 바빴다. 그래서 이번 주말은 충분히 침대에 누워 늦잠을 자고,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이었는데.
“사람 많네.”
윤오가 운의 옆에서 한가롭게 말했다. 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당겨 웃으려고 노력하며 그를 보았지만, 그가 얄밉게 웃자 표정 관리가 어려워졌다.
한가로운 주말의 낮. 동네 아이들과 타지인들이 마구 뒤섞여 유독 북적거리는 꽝꽝 언 야외 스케이트장.
자신은 정말이지 이곳에 올 계획이 전혀 없었다. 온종일 따뜻한 침대 속에서 뒹굴고자 하는 소박한 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주말에 옆 동네 야외 스케이트장 개장하는데, 형이 애들 좀 데려가서 봐 달래.’
김윤오가 지난밤의 일을 인질 삼아서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지금쯤 침대에 누워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늦잠을 자고 일어나 밥상머리에 앉을 시각이었다.
아이들은 자신과 반대로 잔뜩 들뜬 얼굴로 서둘러 스케이트화를 신더니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스케이트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운은 아이들과 달리 최대한 느리게 스케이트화를 신고서, 가기 싫은 학원에 억지로 끌려가는 아이처럼 느릿느릿 빙판에 발을 디뎠다.
소율과 연준은 매년 스케이트를 탔었다고 하더니, 역시나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월하게 겨울 놀이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스케이트장 펜스 너머의 윤오가 미끄러운 빙판을 어설프게 엉거주춤 이동하는 운의 모습에 절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제자리에 멈추곤 고개를 휙 돌려서 펜스 너머에서 팔짱 낀 채 구경하고 있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하지만 윤오는 천연덕스럽게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운은 이내 체념한 얼굴로 다시 스케이트를 살살 움직여 이동하다가,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듯 처음보다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천천히 속도를 내며 세 바퀴를 돌고서 윤오가 있는 펜스 앞에 섰다.
“내가 스케이트 잘 못 탄다고 했잖아…….”
“그게 뭐 어때서.”
윤오가 어깨를 으쓱이며 태평하게 말하자, 운이 살짝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난 중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라고.”
“다들 그런 거야. 괜찮아.”
자신이 어설프게 아이들과 어울려 스케이트 타는 모습을 밖에서 편안하게 관전하며 화사하게 웃는 남자를 보고 있노라면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지만 참았다. 어쨌든 자신은 좁은 동네에서 장사하고 있으니까.
“근데, 넌 왜 보기만 해?”
“스케이트 안 탄 지 오래돼서.”
그리고 어제 늦게 자서 피곤해. 그가 고개를 양쪽으로 꺾으며 말했다.
그리고선 다시 방긋 웃는 얼굴에 황당해진 운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다 뒤늦게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무턱대고 펜스 너머 윤오의 팔목을 붙잡았다.
“내가 알려줄게. 타 봐.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섭섭하지.”
“아니, 난 그냥 보는 게 좋은데.”
윤오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운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기하자.”
그녀의 말에 조금 전까지 아무런 관심도 없던 까만 눈동자에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무슨 내기?”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걸고, 스케이트 내기.”
흠. 윤오가 잠시 고민하는 눈빛으로 먼 빙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뭐, 정 그렇다면.”
그렇게 답한 윤오는 운영 부스에서 스케이트화를 빌리곤 금세 하얗고 투명하게 언 빙판 위로 올라탔다. 천천히 빙판에 S자 곡선을 그리며 앞으로 이동하는 모양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진짜 오랜만이네.”
그러다 제 자리에 서서 날카로운 스케이트 날을 빙판에 탁탁 쳐보는 모습을 그녀가 잠시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귀찮아하던 기색이 사라지고, 일순간 차가운 빙판과 스케이트 날을 바라보는 시선이 진중한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느릿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쓱쓱 스케이트를 움직여 자신의 앞까지 도달하는 모습을 보자 자신의 착각이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운은 겨우겨우 자신의 앞으로 와서 선 윤오가 양팔을 크게 휘청이자 재빨리 손을 뻗어 잡았다.
“넘어질 뻔했잖아…….”
“이런 건 원래 무릎 깨져가면서 배우는 건데.”
윤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자, 운은 그의 양손을 붙잡고서 그에게 스케이트 날을 밖으로 밀며 나아가라는 말과 함께 앞으로 끌어주었다. 그렇게 두 바퀴를 돌고 나니, 윤오는 혼자서도 예상보다는 곧잘 탔다. 당연히 자신보다는 아직 한참이나 어정쩡해 보이는 모양새긴 했지만.
“내기. 핸디캡 줄까?”
그가 고개를 왼쪽으로 갸웃했다.
“아니, 괜찮은데?”
일자로 입을 꾹 다문 운이 고민하는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양심 없어 보이잖아.”
운은 마치 상대방의 패를 다 보고 하는 게임 같아서, 양심이 조금 찔렸다.
“괜찮아. 내기는 내기지.”
하지만 정말로 상관없다는 듯 윤오가 무심하게 말했다. 운은 그 말에 픽 웃었다.
자신이 내기에서 이겨서 뭘 요구할 줄 알고. 운은 윤오에게 무료 일꾼 이용권을 받아둘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시골에서는 잡다하게 힘이 필요한 일들이 많았으니까.
그래도 작은 양심이 쿡쿡 찔려서 운은 윤오에게 핸디캡으로 자신이 조금 뒤에서 출발하겠다고 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그가 옆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그리 대꾸했지만, 운이 더 이상 의견은 안 받는다며 딱 잘라냈다. 이제 막 점심 시간대에 접어들어서 그런지 스케이트장은 처음 왔을 때보다 한산해졌고, 남은 몇몇 사람들도 다 펜스를 붙잡고서 가장자리로만 돌고 있어서 내기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생겼다.
운과 윤오가 어느 정도 적당한 출발점을 정해서 꽝꽝 얼어있는 빙판 위에 섰다. 둘 다 내기한다기엔 비장함이 티끌도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운은 당연히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내기에 그다지 긴장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 운이 윤오가 선 자리에서부터 일 미터 이상 간격을 두고서 뒤로 섰다.
열심히 혼자서 스케이트를 타던 소율은 둘의 내기가 꽤나 흥미진진했는지, 자처해서 근처에서 마르고 긴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그들의 결승선을 지정해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결승점 옆으로 비켜서서 그들을 구경했고, 연준은 출발하려고 대기하는 운의 옆에 서 있었다.
연준이 눈을 깜빡거리며 둘을 번갈아 보다가 입 모양을 크게 하고 외쳤다.
“준비! 땅!”
쉭-. 금속으로 된 스케이트 날이 빙판을 가르는 소리가 깔끔했다.
마치 잘 훈련된 선수처럼 거침없었다. 그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두 손을 뒷짐 지고서 빙판을 갈랐다. 운이 빠르게 멀어지는 윤오의 뒷모습에 순간 넋을 잃고 쳐다보다가 얼른 그의 뒤를 쫓아서 서툴게 빙판을 가르며 나아갔다.
꽤 여유로운 페이스로 빙판을 가르는 윤오의 모습은 오랜만에 스케이트를 탄 초보라기엔 전혀 가당치 않았다. 순식간에 한 바퀴를 돌고서 소율이 정해놓은 결승선에 골인한 윤오에게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설프게 스케이트를 타던 모습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승자는 따질 것도 없이 김윤오였다.
“……뭔데. 뭔데!”
뒤늦게 결승선에 들어온 운이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하며, 스케이트화를 신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화난 걸음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탓에 한 번 넘어질 듯 휘청하다가 간신히 두 발로 제자리에 섰다.
윤오는 그런 운의 모습을 흥미로운 눈으로 구경하며 여유롭게 스케이트의 날을 빙판에 탁탁 치곤 제자리에 선 채 고개를 까딱까딱 양쪽으로 꺾어보고는 입꼬리를 낮게 올렸다.
“거봐.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핸디캡 필요 없다고.”
“아니, 그건 내가……!”
진짜 실력을 전혀 몰랐을 때의 얘기지! 그녀가 황당한 나머지 나오려던 말도 잊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뒤에서 또랑또랑한 소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언니는 몰랐어요??”
소율은 운의 반응이 놀랍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아빠가 삼촌 중학교 때까지 스케이트 선수였다고 그랬는데!”
완전히 사기당했다. 운은 그리 생각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윤오는 그녀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를 본 것 중에 가장 밝은 미소였다.
“내기는 내기지?”
“이건 사기잖아! 누가 일반인 상대로 내기를 해, 선수가!”
“내기는 네가 하자고 했잖아?”
그가 씩 웃자, 그녀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잠시 멍때리다가 다시 반박했다.
“……스케이트 왜 못 탄다고 했어!”
“못 탄다고 한 적 없는데. 오랜만이라고 했지.”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하자, 운이 그의 얼굴을 보며 눈을 흘겼다.
“……완전 사기꾼.”
운이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도, 이내 두 손 다 든 듯한 얼굴로 짧은 한숨을 내뱉곤 다시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어쨌건 내기는 내기니까. 그것도 자신이 먼저 제안한 내기. 그녀는 양심 없이 왕초보 상대로 이겨 먹으려다가 된통 당한 기분이었다.
“딸기농장 일일 아르바이트 좀 해줘.”
“뭐?”
“네가 대타해달라고.”
그렇게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하는 말에 운은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지만, 패자는 말이 없었다.